일상 역사
순종 황제의 굴욕, 일본 황태자를 모시다 본문
조선왕실, 대한제국황실 가족들은 나라를 잃고도 호의호식했다. 이들은 일본황실의 왕공족으로 대우받았다. 달라진 것은 다스릴 나라, 부려 먹을 백성이 사라졌을 뿐이다. 예전 교과서에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한일합방’이라고 표현했으나, 이제는 ‘국권피탈’이라고 쓴다. 일제강점기라는 표현도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합방’이라는 단어도 가려서 쓴 것이니 당시에는 ‘일한병합’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른 바 '일한병합'을 기념하여 일본은 여러 가지 기념물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쇄물이었다. 사진첩, 팜플렛, 엽서 등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왕공족은 여기에 단골메뉴였다. 허울뿐이었던 제국 놀이는 채 20년도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던 황제 가족들은 기념물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래 엽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엽서 하단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여기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뒤) | 完興君 | 完順君 | 宜陽君 | 永宣君 |
(앞) | 威仁親王 | 前韓國皇帝 | 皇太子 | 前韓國皇太子 |
앞줄 왼쪽 첫 번째, 다케히토 친왕(威仁親王, 1862~1913)은 일본 황태자의 수행원 대표로 참석했다. 정식 호칭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이다. 고카쿠 천황(光格天皇, 재위 1780~1817)의 양자로 들어간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有栖川宮幟仁) 친왕 아들이다. 1879년 영국 중국함대 기함 아이언 듀크(Iron Duke) 호에 탑승하여 1년간 함상 근무를 경험하고 소위에 임명되어 해군 장료로 길을 걸었다. 청일전쟁 때는 대본영에서 육상 근무를 하다가 종전 직전 ‘마쓰시마(松島)’의 함장으로 부임해 연합함대에 참여했다. 메이지 천황이 신임하여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 훗날 다이쇼 천황)의 교육을 담당했다. 러일전쟁 때는 해군중장이었으나 마침 독일 황태자 빌헤름의 혼인식 참석 차 유럽에 체재했다. 어쨌든 1907년 황태자를 수행, 조선에 왔다.
왼쪽 두 번째는 전 한국황제, 즉 순종황제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창덕궁 이왕이 되었다. 도대체 무얼하며 살았는 지 알 수 없는 황제다. 어린 부인이 치마 속에 옥새를 감췄다던 때도 뭐 했는지 모르겠다.
왼쪽 세 번째는 일본 황태자, 훗날 다이쇼 천황(또는 대정천황大正天皇)이 되는 인물이다. 이때 친해졌는지, 훗날 영친왕이 일본에 체재할 때 꽤 관심을 갖고 돌봐주었다고 전한다.
왼쪽 네 번째 전 한국황태자, 즉 영친왕이다. 1926년 순종 사후 이왕에 즉위했다. 이 방문을 계기로 태상황제(고종)는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윤허한다. '의민황태자'라고도 하는데 이 호칭은 사후 전주이씨집안에서 붙인 시호로 현대판 왕족 놀이라 하겠다.
그러면 뒷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모두 황실 일원이다.
완흥군完興君은 이재면李載冕(1845~1912, 뒤에 이희李熹로 개명)으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다. 고종의 친형이다.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훗날 후손의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국권피탈 이후 공의 작위를 받고 거액의 은사금을 챙겼다.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1855~1922)은 사도세자의 현손으로 흥완군興完君(흥선대원군의 형) 이정응李晸應의 양자다. 국권피탈 이후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의양군宜陽君 이재각李載覺(1874~1935)은 사도세자의 현손이다. 고종과 같은 항렬이다.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이며 국권피탈 이후 거액의 은사금과 후작 작위를 받았다.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1870~1917)은 고종의 형인 완흥군 이재면의 아들이다. 고종의 정적으로 여러 차례 그를 옹립하려는 쿠데타가 시도되었다. 역으로 그 역시 여러 위협에 시달렸다. 결국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분노에 위협을 느껴 일본에 망명했고, 이때 자신을 충분히 후원해 주지 않는다며 아버지 이재면과 척을 졌다. 훗날 그는 아버지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무루공자無淚公子(눈을 없는 공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권피탈 직전 신궁봉경회라는 친일 신도 단체의 총재가 되었다. 이재면 사후 공작을 세습했다.
그러면 이 사진은 언제 어디서 촬영한 것일까? 매일신보 1913년 7월 9일 자는 이 사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메이지40년(1907)에 금상 폐하(다이쇼 천황)와 함께 조선에 오셨던 아리스가와미야 전하(창덕궁 비원에서 촬영)
다이쇼 천황은 황태자 시절이던 1907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조선을 방문했다. 원래 일정은 1910년 10월 10일 출발이었으나 다소 지체되었다. 황성신문은 아래와 같이 개략의 일정을 소개했다.
일본 황태자 유람 일본 황태자께서 10월 10일에 도쿄를 출발해 군함 가토리 호를 타고 인천에 직항해 경성 체재 중에 우리 황실을 방문하고 귀로에 인천에서 가토리 호를 타고 진해만으로 갔다가 사세보로 돌아가 군함 도네 호의 진수식에 참여하고 가고시마, 미야자키, 오이타, 도쿠시마, 고치 제현을 순유할 예정이라더라.(황성신문 1907.9.25.)
을사늑약에 이어 정미7조약(한일신협약)까지,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라에 이제 곧 주인이 될 나라의 미래 권력이 온다니 난리가 났다. 내각은 인천부와 경기관찰사에는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다.
- 길가를 깔끔히 정돈, 수리할 것
- 한국과 일본의 국기를 관아부터 민가까지 문설주에 교차 게양할 것
- 모시는 처소는 연문(綠門: 환영 사인 가설 문)을 세우워 한국과 일본의 국기를 교차 게양하고 밤에는 전등으로 장식할 것
- 지나가는 도로에 각 학교 학도를 좌우로 엄숙하게 배립하여 예를 표하고 만세를 부를 것.(황성신문 1907.9.27.)
이뿐 아니라 서울에서는 더러운 모습을 안 보시도록 동선 연도에 장막까지 쳤다. (상계동 올림픽의 선구적 행태다.) 그리고 황제는 인천까지 나가 맞이하기로 했다. 황태자가 오는 데 황제가 나가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왜?, 이제는 한 몸 보전하기 바빠졌을 테니 말이다. 황제로서의 자존심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오르지도 말았어야,(열사 충신들 같은 모습을 이들에게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도착 이튿날인 10월 17일 일본 황태자는 정오 덕수궁을 방문해 황제, 황후와 만나 오찬을 하고 오후 3시에 통감부로 돌아가 만찬을 했다. 황성신문은 참석인원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 배참인원(陪參人員) 어제(昨日) 일본日本 황태자皇太子 전하殿下,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가쓰라(桂), 도고(東卿) 양대장兩大將 일행一行이 돈덕전敦德殿에셔 폐견陛見(황제 폐하를 알현한) 후後 별실別室에셔 배식陪食했는데 그 인원(其人員)이 여좌如左하니 황태자皇太子 전하殿下, 일본日本 황태자皇太子 전하殿下,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竣鎔,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이윤용李允用, 총리대신総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內部大臣 임선준任善準, 학부대신學部大臣 이재곤李載崑,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고영희高永喜, 법부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송병준宋秉畯, 예식과장禮式課長 고희경高羲敬 제씨諸氏오, 이토(伊藤) 통감統監, 소네(曾彌) 부통감副統監, 하세가와(長谷川) 군사령관軍司令官, 오카자키(岡崎) 사단장師團長, 쓰루하라(鶴原) 총무장관総務長官, 무라다(村田), 미야오카(宮岡) 양소장兩少將, 고쿠부(國分) 비서관秘書官, 가쓰라(桂) 대장大將, 도고(東鄕) 대장大將, 이와쿠라(岩倉) 공작公爵, 하나부사(花房) 차관次官, 아리마(有馬) 제1함대사령관(第一艦隊司令官), 사토(佐藤) 군의총감軍醫総監 무라키(村木) 무관장武官長, 이토(伊藤) 별당別當, 오이(大井) 대좌大佐, 이다(飯田) 중좌中佐, 하세가와(長谷川) 소좌少佐, 사카모토(阪本), 니시키노코지(錦小路) 양주사兩主事, 오카다(岡田) 가령家令, 아이이소(相磯), 이세(伊勢) 양의兩醫, 다마루(田圓), 구로미즈(黑水), 아키사와(秋澤) 각各 무관武官, 오사코(大迫), 아리마(有馬), 다카스지(高辻), 하라(原) 각各 시종侍從 제씨諸氏러라.(황성신문 1907.10.18.)
완흥군完興君 이희李熹를 빼면 엽서의 등장인물이 모두 나온다. 그러나 장소가 돈덕전으로 덕수궁이지 창경궁이 아니다.
대한제국 황제가 일본 황태자를 다시 만난 것은 이틀 뒤인 19일이다. 황제와 황태자는 통감부로 찾아가 안부를 물은 뒤, 황제는 먼저 환궁하고 황태자는 남아서 일본 황태자와 함께 차를 타고 창덕궁과 경복궁을 유람한 뒤 함께 궁에 왔다가 일본 황태자만 통감부로 돌아왔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날 촬영 소식을 전했다.
어촬영 작일 하오 11시에 대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일본 황태자 여관에 거둥 하셔서 진찬 하실 때 한일 양국 고등관이 배참하였고 촬영하셨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10.20.)
위 기사 역시 촬영 장소는 다이쇼가 머물던 여관이라고 했다. 창덕궁이 아니다. 기념사진첩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보진 못했다. 아마 거기엔 단서가 있지 않을까 싶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그러나 대한제국 대황제폐하 순종은 모두 받아들였다.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일본 황태자가 떠날 때는 남대문 정거장까지 배웅했다.
다들 적극적 친일은 안 했다고 하지만 작위나 은사공채를 거부한 황실은 없었다. 다이쇼 방문에서도 볼 수 있듯, 그들에게는 일말의 자존심조차 없었다. 이것이 팩트다. 심지어 국권을 상실했다고, 나라가 망했다고 자결하는 또는 무기를 들었던 신료는 있었지만 황실은 없었다. 더러 "독립운동 특성상 자료가 남지 않았다"며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처럼 부역의 자료는 넘치고 또 그 논리라면 현재 우리 국민 가운데 국가유공자 후손 아닌 이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독립운동이 과연 '나라'를 찾기 위함이었는지 '내 것'을 찾기 위했던 건지도 불분명하다. 이불 속에서 발차기한 걸 갖고 독립운동이라고 해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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