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부여 부소산성 사자루? 사비루? 그리고 의친왕 이강 공 본문
일제의 잔재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그 시대가 진정 치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흔적을 지우고 없애려고 힘쓰는 이들이야말로 증거를 인멸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자들이다.
몇 년 전 충청남도 부여의 사자루 현판 사건은 그 대표적 일례다. 부여는 백제의 고도로 부소산성은 수도가 위기에 처할 때 농성 하고자 만든 산성이다. 오늘날 부소산성 정상에는 사자루라고 하는 누정이 있다.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의 다른 이름이 사자산泗泚山이오, 부소산성의 다른 이름이 사자성泗泚城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나 부여의 옛 이름이 사비泗沘인 데다 한자도 비슷하게 생겨 ‘사비루’로 잘못 읽히기도 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큰 누각으로 본디 1824년 부여 남쪽 임천군林川郡 관아의 정문이었던 것을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임천군도 1914년 지방행정기구 개편에 따라 부여군으로 통폐합되었다.)
현판은 누정을 옮겼을 때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판의 글씨를 쓴 사람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일본제국 왕족 이태왕李太王 아들 이강李堈(1877~1955)이다. 그 역시 대한제국 때는 의친왕이었으나 국권 피탈 후 이강 공으로 일본제국 공족에 편입되었다. 현판은,
泗泚樓
己未仲夏 李堈 公
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문인 3과가 찍혀있는데, 사진만으로는 내용이 흐릿해 잘 보이지 않는다. ‘기미己未(년) 중하仲夏’는 즉, 1919년 음력 4월을 말하는 것이니 삼일운동이 터진 뒤 두 달 지나 쓴 것이다. 이강이 부여와 왔었는지, 혹은 누정을 건립하며 받아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누정은 고도 부여의 경승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소설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허일이는 골몰해진 의순이를 볼수록 마음은 더욱 달른다. “의순씨 어델 가십니까?” 하며 따라오던 허일이도 의순이 있는 편을 향하고 급히 걸어온다. “이 집이 사자루입니다. 바로 이 부소산을 사자산이라고도 하고 둘러 있던 성을 사자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의순씨 뭘 그리 깊이 생각하십니까? 난 의순씨와 한 고향 사람이란 정을 느끼는 관계도 있지만 그보다도 의순씨의 고결한 인격과 투철한 재조에 존경을 하고 남달리 대하고 싶습니다. 혹 거리끼는 문제가 있으면 그건 내가 책임을 지고라도 해결을 해드리지요. 혹은 현재 나의 가정 문제라든지 혹은 의순씨의 생활문제라든지 무엇이든 맡겠습니다. (이근영李根榮 작 <제삼노예第三奴隸> 가운데 / 동아일보 1938.5.31.)
이건한 지 1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며 퇴락한 느낌을 주었던지 충청남도는 개수 작업에 착수했다. 아마 위 소설은 그 이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도 부여의 사자루를 개수
일천백원의 예산 세우고 대유람지 계획 진행
백제 고도 고적의 부여 일대 유람지를 만들고자 모든 계획을 한다 함은 기보 하였거니와 애사 깊은 반월성적과 유유히 흐르는 사자수 백마강을 밑으로 수북정을 비껴 마주 보고 우연히 솟아있는 부소산성의 사자루는 부여를 찾는 역사가들과 유람객의 죽장을 받듯이 한 번은 이끌어 머물게 하는 곳인데 수백 년 퇴락한 건물은 백제 멸망의 황량한 기분을 보여주던 바 금년 가을에 이를 개축코자 충남도에서는 이미 일천백 원의 예산을 세우고 상부에 신청 중이라 한다.(동아일보 1934. 7. 9.)
광복 이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현판도 잘 남아있었다. 그러나 2002년 11월 18일 부여군은 멀쩡한 현판을 떼어내고 새 현판을 걸었다. 사유는 현판의 ‘이강 공’이 문제였다. 후손 등은 현판의 '이강 공'의 '공'이 일본 왕실에서 책봉해 준 직함으로 일제 잔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바로 전해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현판 교체를 결정했던 것.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강 공의 기존 현판에서 ‘公(공)’ 만 뺀 모습으로 새겨 현판을 다시 건 것이다. 이강 공이 문제라면 이강 공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씨를 걸어야지 이건 무슨 행태일까. 게다가 ‘이강 공’이란 그 글자는 이강 본인이 쓴 것으로 작품의 일부였는데 말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종축 서예 작품 “의친왕 이강이 쓴 「연의지」시”에서도 그는 자신을 “이강 공”이라고 썼다. 빼달라고 했던 이들이 저 족자를 봤다면 저기서도 '공'자를 지우거나 잘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을는지...
1. 사람과 직함이 따로 다닌 것도 아니고, 2. '공'호를 안 받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3. 본인 스스로 그 직함을 썼거늘, 일제의 잔재를 청산할 요량이거든 ‘일제강점기 왕공족으로써 호의호식했던 이강 공의 현판을 떼어내자’라고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삼일운동 직후 망명 기도 같은 이야긴 하지 말자. 본인 빼고 모두 형을 살았으니.)
본디 걸려있던 현판은 정림사지박물관에 보관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정림사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현판은 '이강 공'의 '공'자가 심각하게 훼손된 듯 보인다. 80여 년 걸려있을 때도 멀쩡하던 것이 이리 되었다는 것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리 하지 않고서야 잘 이해할 수 없다.(그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야 한다. 문화유산 파괴범이다.) 이리 ‘공’만을 지운다고 해서 이강이 작위를 받았던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작위를 받은 게 부끄럽다면 ‘공’만을 지울 것이 아니라 ‘이강 공’ 모두를 지웠어야 했다. 기록을 부분 부분 지워 가며 손톱만큼 남은 것으로 독립운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역사왜곡이자 친일망령이다.
이강은 대한제국 시대까지 ‘의친왕’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의 ‘이강 공’이고, 광복 이후에는 그냥 시민 ‘이강’일뿐이다. 만일 왕호, 공호로 기억되고 싶다면 그가 마지막 가졌던 칭호, ‘이강 공’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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