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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 공의 축첩 본문

이왕가 사람들

의친왕, 이강 공의 축첩

자불어 2024. 4. 1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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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은 천도교에서 낸 잡지로 1920년 6월에 창간했다. 천도교의 대종사장 정광조는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교주 손병희와 의논하여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개벽은 그 결실이었다. 손병희와 의친왕은 친분도 깊었다니, 개벽에 소개된 기사는 의친왕을 잘 알고 쓴 글이리라. 아래는 1924년 7월 1일 발간된 제49호의 기사다.


개벽의 기사 제목은

색색형형의 경성 첩마굴 가경가증할 유산급의 행태

色色形形의 京城 妾魔窟 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

번역하면

각양각색 경성의 첩 소굴, 놀랍고 가증스러운 유산계급의 행태

글쓴이는

관상자觀相者


우리 조선 사람치고는 웬만한 사람은 대개 다 첩이 있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이도 있다. 학교의 교원도 있고 학생도 있고 관리도 있다. 코만 오뚝하고 얼굴만 반반한 자면 의례이 첩이 있어야 행세할 줄 안다. 이와 같은 병적인 사회에서 진정 소위 특수한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으니 어찌 다 말하랴. 아무라도 그다지 찬성할 바는 아니다마는 호색한 것이 아니고 가정상 관계(예: 조혼 폐해, 후손 생산) 기타 부득이한 사정에 따라 축첩생활을 하는 것은 아직 이 사회제도의 죄악에 부쳐 그만두고 현재 사회에서 누거만의 재산을 가지고 사치, 호광豪狂으로 2~3명의 첩을 얻어 별별 발광의 짓을 하는 자에 한해 말하면 자연히 귀족, 부호 밖에 말할 수 없다. 이유야 어떠하든 돈을 안받는 무료 관상이니까 반드시 다 봐줄 의무도 없다. 다만 관상자의 자유일 뿐이다. 잔소리는 그만두고 곧 시작해 보자.
첫째, 경성의 민씨로 말하면 조선의 훈가 벌족인 동시에 이왕가의 세세외척이었다. 불알만 달고 나면 눈이 없던지 심신이 상실되었던지 감사나 관찰사는 의례 떼어 논 당상이오 참판, 보국도 향촌사람의 가자노질통정보다 몇 배나 쉽게 했다. 국고금은 물론이고 인민의 재산을 자가의 주머니로 생각하여 마음대로 빼앗고 따라서 자기 집에 사당은 없을지언정 첩은 다 두었다. 과거의 인물을 그만두고 현재로만 말해도 민씨집처럼 첩 많은 집은 없다.

...(중략)...

그 외 실업가, 변호사, 의사 등 중에도 허다하여 말을 하려면 한의 없으나 다음 기회로 또 밀고 최후에 이왕가 왕족들은 어떠한지 좀 말하고 그만두자. 이씨 중에 이강李堈 공公은 다 아는 일이니까 재론한 필요도 없거니와 이지용李址鎔, 이재각李載覺, 이해승李海昇, 이재극李載克 등 여러 사람이 다 남 부럽지 않게 한참 첩 놀이를 잘하였었다. 그러나 그중 가련한 이는 이재극 남작이오. 또 왕족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은 이윤용李允用 남작이었다. 진정 소위 제 것 두고 못 먹는 것은 왕 장군의 고자라고 두 사람은 재산도 다소 있지만 재산권을 다 지키고 이윤용은 유명한 산월山月마마의 유언으로 얻은 침모針母 첩에게 재산권을 뺏겨서 한 푼도 마음대로 못쓰고 반찬 하나 잘 먹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를 대하면 한숨을 훌훌 쉬면서 첩으로 호강하는 놈은 다 얼빠지고 남의 속 모르는 놈이라고 자탄만 한다. 이 사람들아! 언제는 첩 얻어 가지고 배부를 줄 알았던가. ...(하략)


"현재 사회에서 누거만의 재산을 가지고 사치, 호광豪狂으로 2~3명의 첩을 얻어 별별 발광의 짓을 하는 자"

"이씨 중에 이강李堈 공公은 다 아는 일이니까 재론한 필요도 없거니와"

"다 남 부럽지 않게 한참 첩 놀이를 잘하였었다."

 
그렇다고 한다.

개벽 1924년 7월호가 없어 5월호 표지로 대신한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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