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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사람들

사동궁, 의친왕의 저택은 왜 사라졌나?

자불어 2024. 4. 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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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궁寺洞宮은,

대한제국의 의친왕부義親王府, 일제강점기 이강李堈 공저(후에 이건李鍵 공저)다. 오늘날 관훈동, 인사동 일대 대지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부속 건물 하나만 남아 인사동 관광홍보관이 되었다. 
그러면, 왜 이리 되었을까? 어디선가 게재한 글을 읽다보니 대한민국 정부가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 1945년 사동궁을 강탈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위 설명은 기본 팩트부터 틀렸다. 1945년은 정부수립 이전으로 이승만은 광복 후 막 귀국한 유력 인사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황실재산처리법은 1954년 9월에서야 제정되었다. 사동궁 지분이 쪼개진 건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동궁 양관

광복 후 사동궁이 어떻게 해체되었는지,

 여기서 그 진상을 정리해 소개한다. 
 

사기에 걸린 이강공

전 융희황제의 제씨(남동생) 되는 이강 씨는 8.15. 해방과 더불어 일층 근신을 기하고 있는 틈을 타서 그의 소유재산이 적산 취급을 당한다 하여 당시의 시가로 천수 백만원이나 되는 것을 감언이설로 꾀여 4백만원에 팔아준다 하고 현금은 약 150만원 가량 밖에 안 주고 사기횡령을 당하였다고 이응래李鷹來 외 1명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하였다는 바 지난 1일 담당검찰과 강석복姜錫福 씨는 진상을 규명코자 현장 조사를 하였다 한다. [한성일보 1947.4.2.]

"사기에 걸린 이강 공" (한성일보 1947.4.2.)

이야기인즉슨 국권피탈 전 의친왕이던 이강은 광복 이후 근신하고 있었다. 이때 모리배가 나타나 어차피 적산으로 다 빼앗길 재산이니 팔아치우는 게 장땡이라는 말을 듣고 헐값 4백만원에 넘겼다. 그러나 대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사기횡령이라며 1947년 4월 1일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대체로 사기는 치는 놈들도 문제지만 당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광복 후 몰수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그전에 뭔가 챙겨보려다가 이런 꼴을 당한 것이다.  혹자는 위 조사관 강석복이 해당 조사 이틀 뒤인 1947년 4월 4일 사임한 사실을 근거로 이승만이 공가 재산을 몰수하고자 획책하고 강석복을 쫓아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수립, 즉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1948년 8월 15일로, 기초 수준의 역사 상식에도 반하는 추론이다.
 

의친왕 이강, 혹시나 새 정부에게 빼앗길까, 속아서 헐값에 팔아치우다.


의친왕궁義親王宮은 어디로, 모리배謀利輩의 사유私有? 국유國有?
무참無慘! 건축지로 벌채된 왕궁王宮 고목古木

시내 관훈동에 있는 의친왕궁은 해방이 되자 청파동에 거주하는 박모가 이강 씨에게 매도를 강요하여 이강 씨는 하는 수 없이 시가 수백 만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불과 2백만원에 박씨에게 매도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긴 지 머지않아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동시 의친왕궁은 국가적 재산인 바 부정매매함은 부당하다고 하며 대법원장에게 통고하여 도로 이왕직에서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당시 대법원에서는 이를 묵살하게 되어 이강 씨는 그때야 비로소 공산주의자들에게 몰수당하지 않음을 알고 이는 박모의 사기적 수단이라 하여 고소를 하였는데 이강 씨 담당 변호사 모씨는 이강 씨의 변호는커녕 도리어 박에 붙었다. 그런데 박모는 이러한 고소사건이 생기기 전부터 최시화라고 하는 북한에서 막대한 금액을 내약하고 최와 함께 결탁하여 이강 씨의 변호사를 앞세워(전위로) 이강 씨에게 공갈협박으로 고소취소를 강요하자 이강 씨는 자기의 명예상 만강의 눈문을 머금고 고소를 취소하게 되어 박은 드디어 최에게 매도해 버렸다. 이리하여 의친왕궁은 일개 모리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후 최는 아무 때나 의친왕궁 문제가 순조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군정고관들과 상통하여 그들에게 분할 매매를 하여 자기 주위를 옹오하게 했는데 이것을 안 동민과 각 애국단체에서는 그의 부당성을 지적하게 되어 최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몇몇 애국단체의 사무실로 사용할 것을 허락하는 동시 재감애국동지在監愛國同志석방원호회장援護會長 명제세明濟世 씨에게 청해 그곳에다 사무실을 정하도록 해서 동회에서도 결국 의친왕궁에 들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최는 이 궁내 2백여 년 된 고목을 채벌 하여 급급히 가옥을 건축하는 한편 전기 ‘재감애국동지석방원호회’에다 아무 예고조차 없이 동회사소를 파괴하고 동 파괴장소에다 가옥을 건축 중에 있음으로 이는 망국도배의 역적행위라 하여 방금 동민과 전기 재감동지석방후원회에서는 맹렬히 최의 비행을 비난하고 있으며 동 문제를 당국은 여하히 취급할는 지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대한일보 1948.9.14.)

"의친왕궁은 어디로"(대한일보 1948.9.14.)

이강은 소송을 했다. 기사에도 언급되어 있듯 그제서야 몰수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였다. 그러나 이내 소를 취하했다. 공갈협박을 당했다는데 도대체 어떤 약점을 잡혔기에 변호사조차 그의 편이 돼주질 않았던 것일까. 그리하여 결국 사동궁은 박씨의 소유가 되었고 다시 최씨의 소유가 되었다. 최씨 또한 혹여 사동궁을 나라에 빼앗길까 염려하여 군정청 인사에게도 손을 쓰고 분할 매매도 시도했다. 정치 단체에 일부 공간을 내주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하자 그 위기감은 고조되어 궁 안 2백여 년이 된 고목을 벌채하고 급히 가옥을 짓기 시작했다. 사동궁은 그렇게 순식간에 파괴되어 갔다.
 

몰수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달은 의친왕,  소송을 걸다!

그러나 공갈협박에 소송 취하?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던 걸까?


매매된 것도 무효, 구왕궁재산대위서 성명

이조 500년 간에 걸쳐 왕실의 손에 유지되어 온 약 5백억으로 추산되는 막대한 수의 구왕궁 재산은 과반 국무회의 통과와 아울러 불원 공포 실시될 것으로 예상되는 구왕궁 재산 처분법에 따라 앞으로 머지않아 국법 혹은 대통령령에 의하여 처분될 것으로 이씨 일족을 위시한 관계 당국자는 이 법 안 적용 범위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이 재산 중에는 이미 일반에게 매각되어 개인 혹은 학교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하여 동법의 효력이 이러한 재산에는 미치게 될는지가 문제라 하는데 18일 구왕궁급왕족재산파괴방지대책위원회舊王宮及王族財産破壞防止對策委員會에서는 이미 일반에게 매각된 구왕궁 혹은 왕족의 재산이라도 이는 악질 모리배의 암약으로 세사에 어두운 왕족을 속여 막대한 폭리를 하였으므로 이러한 종류의 재산이라도 마땅히 동법을 적용시켜 처분하여야 할 것이며 그런 예로 관훈동寬勳洞에 있는 사동궁寺洞宮은 해방 후 박응래, 김선태, 최시화 등이 구 의친왕 이강을 속여 현재까지 막대한 모리를 하였으며 동궁은 구황족재산 중에서 가장 무참한 파괴를 당하였으니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도 당연히 몰수하여 국법에 의해 처분할 것을 강조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반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조선중앙일보 1949.2.20.)

"매매된 것도 무효" (조선중앙일보 1949.2.20.)

 

악질모리배, "세사에 어두운 왕족" 을 속여! 


영화榮華도 물거품(泡沫)으로 사라진다 환상幻想만남은 이왕가李王家

(전략) 한편 현 운현궁과 사동궁寺洞宮은 벌써 일반에게 매각되었다 하는데 이중 전기 운현궁은 작년 7월 그 당시의 미군정장관 딘소장의 명령에 의하여 동궁同宮에 세대주인 왕족 이청李淸(13)의 앞으로 명의변경을 하였던 것을 이청이 그동안의 많은 부채를 갚느라고 작년 12월에 동 궁내에 있는 양식건축 1동과 토지 약간을 덕성여자중학교에 매각하고 나머지 조선식 건축물과 동궁에 속하는 전답은 그대로 이청의 명의로 있다는 바 동 전답에서는 매년 1,000여 석의 추수를 하고 있다 한다. 사동궁 역시 동궁의 세대주이던 이강은 2년 전 매각을 하여 버린 것으로 아직 동궁의 처분은 문제화되어 이렇다 할 해결책이 안 나오고 있다는 바, 금년 법률의 효력이 동궁에까지 미치게 될는지는 아직 의문시되고 있다 한다.(남조선민보 1949년 2월 13일)

"영화도 물거품으로 사라진다"(남조선민보 1949년 2월 13일)

 

의친왕의 매각에 국유화를 하려 해도 답 안 나오는 사동궁


정부는 구왕궁급왕족재산파괴방지대책위원회舊王宮及王族財産破壞防止對策委員會를 설립하여 이런 파괴를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사유로 쪼개져 파괴된 사동궁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사동궁 파괴의 단초를 연 자는 바로 다름 아닌 "세사에 어두운 왕족" 의친왕 이강 본인이다. 이미 팔아치운 걸 누구를 탓하랴. 그리고 누가 사동궁을 묻거든 그 연혁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전 의친왕 이강, 1947년 모리배에게 팔아치우다."

 

역사에 성역은 없습니다.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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