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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의친왕 이강의 자술서 본문

이왕가 사람들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의친왕 이강의 자술서

자불어 2024. 4. 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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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의친왕 항목에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 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고 했다. 또 나무위키는 “고종의 5남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유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의 조사 내용은 이를 의심케 한다. 후손을 비롯한 이강의 지지자들은 이 조사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큰 파장이 있어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로 가려 했던 사실은 당시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실린 정도로 감춰진 일도 아니었다. 또한 심문조서를 굳이 조작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망명을 주도했던 김가진金嘉鎭 은 의친왕이 “부족하지만” 순종은 창덕궁에 있고, 영친왕은 일본에 있어 도모할 수 없었기에 대안으로 삼은 것 뿐이라 생각했다.  돈 문제 등이나 이방자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전후 삶을 돌아볼 때, 조서의 내용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오히려 사건의 진실에 가깝다. 이는 그저 자신들에겐 불리한 사료는 “믿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병증病症일 뿐이다. 그럼 조서 내용를 보자. 중간 중간 생략했음에도 꽤 길어 인내심을 요하나 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한다면 필독을 권한다. 


위는 대정大正8년年 제령制令 제7호 사건에 관하여 대정大正8년(1911) 11월 21일 경성京城 총독저總督邸에서 신문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다.

문) 성명, 연령, 신분, 주소, 본적지 및 출생지는 어떠한가.
답) 성명은 이강李堈 공公. 연령은 43세. 신분은 왕족. 주소는 경성부京城府 관훈동寬勳洞 196번지. 본적지는 경성부京城府 관훈동寬勳洞 196번지. 출생지는 경성京城.

문) 훈장을 가지고 계신가.
답)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

문) 처벌되신 일은 없는가.
답) 없다.

어떤 부자가 
나의 어려운 처지를 듣고
돈을 2~3만원 가량 싼 이자로 
대여해 주겠다기에

문) 이번에 불령선인不逞鮮人들과 외국으로 나가려고 했던 전말을 진술하십시오.
답) 지난 달 초순경이었다고 생각된다. 날짜는 잘 기억하지 못하나, 정운복鄭雲復이 심부름꾼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는데, 좋은 일이 있으니 한번 뵙고 싶다는 것이었으므로 김삼복金三福을 시켜 좋은 일이란 어떠한 것인가고 물었던 바, 어떤 부자가 나의 궁상을 듣고 돈을 2·3만 원 가량 싼 이자로 대여해 주겠다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부탁한다고 하며 그에게 돈 주선에 관한 일을 부탁하자, 자주 심부름꾼을 왕래시킨 결과 한번 만나 약속을 하고 싶다고 하여 그 날짜가 지연되었는데, 어느 날 정운복鄭雲復이 “그 사람들이[전주錢主] 만나고 싶어한다, 간동諫洞의 어느 집까지 나와 달라”고 신청해 왔으므로, 나는 싫다 하고 이번에는 이쪽에서 이문동里門洞에서 만나고 싶다 하자 상대방에서 싫다고 하여 점점 늦어져 그대로 지나치고 있던 차, 또 다시 심부름꾼을 보내와 충청도 공주公州 사람으로 경주京城에서 재산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람이 어음이나 차용증서로 돈을 빌려주겠다, 자세한 것은 만나서 정하자는 것이었으나, 그것도 또 내일·모레하며 지연되고 김삼복金三福도 중지하심이 어떻겠느냐고 한번은 충고도 했으므로 거절해 두었는데, 이달 9일 저녁 어떤 사람으로부터 경성 시중에는 나쁜 사람이 배회하니 외출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고 또 이왕[순종] 전하 및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려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며 다시 주의를 주었으나, 나는 그러한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대답해 두기까지 한 형편으로, 외부에는 이문동의 별저別邸가 한 채 있을 뿐으로 그 밖에는 나가지 않기로 정하고 있던 터에, 정운복鄭雲復으로부터 돈이 되었으니 곧 오시기 바란다고 하며 소식이 왔으므로 돈이 욕심이 나 김삼복金三福을 데리고 저택 뒤의 전동典洞으로 나가자, 뒤에서 사복私服의 탐정 비슷한 사람이 미행하므로 매우 공포를 느껴 귀저歸邸하려고 생각했으나 이문동里門洞 별저別邸가 바로 근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 저택의 문 안으로 들어가 형편을 살피니 탐정은 없어졌으나 그래도 외출이 무서워서 삼복三福을 심부름시켜 그 전주 등을 데려 오라고 명했으나, 그들은 대금을 가지고 외출하기는 어려우니 좀 오시기를 바란다고 하기 때문에, 또한 정운복鄭雲復은 경찰에 근무하고 있는 신분이므로 결코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인력거를 불러 타고 삼복三福의 안내로 전동典洞의 어떤 지저분한 집에 들어간 즉, 한 방에 정운복鄭雲復과 키가 크며 마마자국이 있고 비단옷을 입은 한韓선생이라고 부르는 한 사람 및 이시종李侍從이라고 부르는 사람 도합 3명이 함께 있다가 브랜디를 내놓으며 내게 권했던 바, 정과 한의 두 사람이 자리를 떴을 때 이가 나에게 어장漁場의 이야기를 하므로 그 이야기라면 그만두어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방 바깥 쪽에서 무엇인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고 생각하자 이는 나가고 정과 한이 들어왔는데, 그 뒤에는 권총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그 밖에 이름 모를 인물이 6·7명 있었으며, 정은 나에게 부들부들 떨면서 “전하 가십시다, 결심하십시오, 시기가 왔습니다, 한에게서 들으십시오” 하므로,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밖에 권총을 가진 사람 등이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짓을 하지 말라고 제지하였는데, 그때 “해외로 가달라, 미국으로 가십시다”라고 하고 다른 놈들은 이번에는 결심하십시오 하므로 승낙하였더니, 곧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면서 인력거에 태워 한과 다른 한 사람이 동행하여 경복궁景福宮 앞 길에서 전 경관연습소 옆을 통과하여 북문北門 앞으로 가자, 인력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곳에서 걸어서 북문北門 밖 세검정洗劍亭 윗쪽의 자그마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정운복이나 김삼복은 나의 발이 더디므로 북문 앞에서 함께 되어 같이 그 집에 도착하였다. 그 집의 문패를 본 즉, 최성호崔成鎬라는 이름이었다.

...(중략)...

문) 안동역安東縣까지는 기차로 가고 그 뒤로는 배로 어디(까지)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답) 그들은 상해上海 또는 미국美國까지 가 달라고 하였으나 나는 정운복에게도 빨리 도망쳐 경성으로 들어가 관헌에게 알리라고 한 일도 있는데, 정은 앓는 몸이라 보행하기 어렵다며 거절할 정도였으므로, 그것으로 보더라도 나는 틈이 있으면 어디선가 도망쳐 올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틈이 나면 어디선가
도망쳐 보려했다. 

문) 그러면 평양·신의주 등과 같은 큰 역에는 경관도 있으며 역무원(驛員)도 많이 있으니 보호를 구해 도망칠 길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답) 도중 한 사람은 반드시 옆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만약 도망치면 죽게 되리라고 생각하여 두려움으로 지냈는데, 안동현安東縣에는 동경東京 이래 얼굴을 알고 있던 마쓰모토松元 서장署長이 있었으므로 그래서 돌아온 것이다.

문) 안동현역安東縣驛에서 플랫폼으로 나오실 때 순사가 있다며 두서너 번 뒷걸음치면서 주저하셨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 그것은 붙어 있는 놈이 끌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나의 참뜻은 아니었다.

붙어있는 놈이
끌어서 그랬던 거다.
내 참 뜻은 아니다. 

문) 이번의 타출他出은 전혀 불령자不逞者 등의 협박 때문에 부득이 연행되었다고 진술하셨으나, 그 이전에 또한 상해上海 임시정부원(假政府員)이라고 칭하는 불령선인 강석룡姜錫龍이란 자가 비전하妃殿下의 동생 김춘기金春基를 시켜 임시정부(假政府)를 위해 외유外遊를 권고하여 승낙을 받았으며, 돈이 조달되는 대로 출발할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답) 그것은 별개이다. 이왕李王 전하와 나와 또 박후작朴侯爵 및 작爵을 사양한 한규설韓圭卨·윤용구尹用求·민영달閔泳達 등을 임시정부(가정부)로 연행한다고 하여 그 강석룡이란 놈은 국사에 관해 여러 번 처벌을 받은 인물로서, 김춘기의 집과는 가까운 관계가 있는 집이라든가 하여 김춘기의 형 택기澤基에 대해 우리들에게 외유를 권하도록 제안했으나 택기는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후 김춘기가 나에게 강석룡이 임시정부(가정부)로 모시겠다고 한다는 것을 전하므로 나는 “돈이 없어서는 갈 수 없다, 빈손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다”고 대답해 두었던 바, 또 말하기를 돈이 없어도 전하께 세 번의 식사를 게을리 하는 것 같은 무례는 하지 않을 터이니 반드시 모시고 싶다고 제의한 일이 있었다. 나는 별로 일본에 대해 반대하는 것 같은 생각은 없으나, 아무튼 이왕직李王職 내부에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 뿐으로, 우리 사무소와 같은 데에서도 나 및 나의 일가에 대하여 냉담한 것이 놀라울 정도로서 도저히 외부의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나도 이준공李埈公 전하와 같이 온순하고 아무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좋은데, 아는 바대로 급한 성질이어서 나쁜 일을 보거나 들으면 그대로 참고 견디어 낸다는 것이 안되므로 성질상 반대를 받기도 하나, 아무튼 불평이 쌓여 고민의 감정을 금할 수 없어 때로는 이것을 술로 해소하려고 하며, 취해서는 난폭해지는 일이 있어 더욱 신용을 잃는다. 잃으면 마침내 번민하고 몸둘바 없게 된다. (이에) 더하여 가족들이 많아 예산내의 금액을 가지고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어 각처에 차용금이 누적되어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부득이 난폭하지만 사무소의 손을 거치지 않고 몰래 빚을 져 그 급함을 면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부자유와 불유쾌함은 말로써 다하기 어렵다. 따라서 때로는 항상 출입하는 김춘기 등에게 영작榮爵(영예로운 작위)을 내던지고 하나의 평민이 되어 자유 생활을 희망한다는 뜻을 누설한 일이 있다. 특히 김춘기는 근래 서로 사랑하는 소실을 얻어 두 사람이 외국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겸사겸사 나에게 외유를 권하면 그도 또한 동행이 허락될 것으로 생각하여 강석룡의 외유를 열심히 전갈하고 어떤 때에는 강을 만나라고까지 권한 일도 있었다. 어떻든 외유한다고 하면 돈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당시 정운복이 주선해 준다고 하여 앞서 말한 대로 차용의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거듭거듭 내가 일본을 배격하기(排日)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우나 일신상의 불평이 있기 때문이었으니 그 점은 잘 통찰하기 바란다. 아무쪼록 장래 나의 일신으로 하여금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

나는 별로 일본에 대해 
반대하는 것 같은 생각은 없으나,
이왕직 내부에서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 뿐, 
가족들이 많아 
예산 내 금액을 갖고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어,
부끄러우나 
일신상의 불평이 있기 때문이니

...(중략)...

문) 무엇인가 본건에 대해 달리 진술할 것은 없으십니까.
답) 참으로 일신상의 일을 말해 불평 같기는 하나, 내가 술을 마시거나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대개는 술 때문에 전후를 기억하지 못하며, 차용금에 관해서는 경제 관념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이익을 빼앗기고 나의 얻는 바가 없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난폭하게도 뒤에 정리를 해달래고 있다. 물론 경제상에 관해서는 예산상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안다. 그래도 너무 그 방법이 냉정하여 나로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적당한 보호의 방도를 세워 유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바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와 헤어져 민비閔妃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다음에는 똑같이 엄비嚴妃에게 억압당했으며, 이어서 지금은 또한 이왕직 중의 간사한 놈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나를 어리석다고 하겠으나 선악의 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불평이 연유하는 바를 통찰하여 잘 중재仲裁해 주기 바란다. 또 본건의 처벌에 있어서도 아무쪼록 관대한 처분을 간곡히 바란다(切望).

나는 어려서 어머니와 헤어져 
민비閔妃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다음에는 똑같이 
엄비嚴妃에게 억압당했으며, 
이어서 지금은 
또한 이왕직 중의 
간사한 놈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또 본건의 처벌에 있어서도 
아무쪼록 관대한 처분을 
간곡히 바란다

작성일 大正 8년 11월 21일
李堈(이강)

경성京城 총독저總督邸에서
신문자 경기도京畿道 제第3부장部長 사무관事務官 지바 료(千葉了)
통역 통사 경부 모리 로쿠지(森六治)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은 이강 공이 본 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은 아니어도 충분히 자의로 움직였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지바 료는 집요하게 질문했고 이강은 1. 변명하기 급급했고, 2. 동행했던 동지들 탓으로 돌렸으며, 3. 자신의 불우했던 삶까지 언급하며 용서를 구걸했다. 여하튼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동시기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모두 이강 자의로 상해 망명을 시도했다는 것을 시사한다.(이 부분은 나중에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여하튼 망명기도는 훌륭했지만 사건은 이렇게 끝났다. 이 사건 이후 이강은 자의반 타의반 잠수를 탔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전협(全協, 위의 한선생) 등이 체포, 수감되면서 독립운동 세력 가운데 복벽파(왕정복고 대한제국 재건파)도 사라졌다. 그리고 대동단 역시 사회주의로 전환했다. 과거 안중근이 일제의 재판에 당당하게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 역시 일본의 공판 기록이다.(몇 자 지운다고, 숨긴다고 되지 않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선택적 사료 해석은 역사가 아니다. 바로 세워야 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결과를 정해놓고 업적을 늘어놓는 평가다.  의친왕, 자칭 '이강 공'은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자라고 할 수 있을 지 심도있는 검토가 필요하다. 

이강 공의 망명 사건을 다룬 매일신보(1919.11.27.)

참고논문 
박현모.(2007). 일제시대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의 대립.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30(1), 5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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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의 저택, 사동궁을 파괴한 자는 누구인가

사동궁寺洞宮은 대한제국의 의친왕부義親王府, 일제강점기 이강李堈 공저(뒤에 이건李鍵 공저)다. 위키백과는 “191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따르면 사동궁은 대지가 총 7880㎡에 달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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