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이강 공, 총독, 정무총감과 오찬 회동 본문
전 의친왕 이강 공은 1919년 망명 기도가 실패한 뒤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주장처럼 국내여행이 일절 금지되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이강 공은 예전과 같이 이곳 저곳 다니며 풍류를 즐겼다. 송암신정기를 썼던 1928년 음력 8월(양력 9월)에도 개성을 당일치기로 놀러갔다 오셨다. 이태진은 1927년 "12월부터 의친왕 자신도 경기도 경찰부의 경비(警備, 감시) 대상으로 올라 사회 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세종시 자료집, p.93)고 했는데, 사회생활을 금지당한 이강공이 했던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강 공은 1928년 3월 14일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조선총독과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 정무총감을 조선호텔로 초대해 오찬을 가졌다. 조선호텔은 바로 고종이 황제 즉위에 심취해 제일 먼저 만들었던 건물인 환구단이 있던 곳이다. 의친왕 이강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금물이다.(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 사진을 보니 이강 공 전하 표정도 참 므훗하다.
금병풍 상록수 그늘에 축복되는 화기와 춘광
이강 공 전하께옵서 총독, 총감 초대
총독, 총감이 신임 이래 한 번도 식탁을 함께 해보신 일이 없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옵신 이강 공 전하께옵서는 14일 낮에 조선호텔에 오찬회를 여시고 총독, 총감을 주빈으로 한(창수) 이왕직장관, 이(항구: 이완용 아들) 장시사장掌侍司長, 마쓰테라 다케오(松寺竹雄) 이왕직 차관대리,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 서무과장, 마쓰무라 마쓰모리(松村松盛), 야마다(山田) 양 비서관, 다나카 도쿠타로(田中德太郞) 통역관, 사쿠마 마사오(作間應雄) 어용괘, 이(원보) 형사과장, 이강공부 이케지리 마스오(池尻萬壽夫) 사무관, 동 강(필우) 무관 등 11인에 배식을 허하시어 아담한 환담을 하옵시게 되었었다. 영시 반 정각이 가까워 옴에 총독, 총감이 전후하여 플록코트에 미소를 띄우고 전하가 기다리시는 응접실로 들어가 시사에 대한 한화閑話가 약 10분 동안 있은 후 즉시 대식당은 열렸었다. 대식당에는 찬란한 금병풍을 치고 사면에는 상록수가 우거져 이 따뜻한 첫 봄빛은 오색이 영롱한 유리창으로 곱게 빗겨 들어섰다. 군복에 약장 하나만 차신 이강공 전하를 좌우에 뫼신 총독, 총감 사이에는 주배가 거듭되고 환담이 끝날 줄 모를 때 음악실에서 아뢰는 주악은 한층 평화와 열락을 노래하는 듯 하오 2시반 경에 오찬회는 화기가 무르녹는 가운데 끝이 났다.[매일신보 1928년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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