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을사늑약 폐기를 요구하는 신하들에게 집에나 가라던 고종 황제 본문
*고종이 "을사조약의 폐기에 일도 노력하지 않았다"는 저의 착오가 있어 원고를 수정해 게재합니다.
고종 또는 순종을 미화하는 사람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믿을 수 없는 자료로 치부한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막대한 1차 사료가 있다며 그것을 번역하면 고종과 순종에 대한 재조명이라도 벌어질 듯 내심 기대한다. 그 1차 사료 가운데 하나가 승정원일기다. 나무위키 승정원일기 항목에는 그런 희망이 그대로 담겨있다.
“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을사늑약 체결 열흘 뒤인 광무9년(1905) 11월 27일,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상소를 올린다.
신들이 근심과 울분에 사로잡혀 망령되게 저희들의 생각을 아뢰고 모여서 명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헤아려 처리할 것이라는 비답만 내리시고 시원스러운 윤허를 주저하시니 더욱더 안타깝고 억울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고 폐하의 안위가 여기에 달려 있으며 신민臣民의 생사 역시 여기에 달려 있으니 진실로 무엇보다 먼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을 처단하여 천하에 사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각국 공사관에 성명을 내고 모임을 열어 담판을 한다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폐지하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대로 두고 두루 돌아보며 시일만 끈다면 순식간에 폐하의 일은 없어지게 될 것이니 폐하의 일이 없어지면 종묘사직과 신민들은 장차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들이 가슴을 치며 머리를 쳐들어 거듭 호소하여 그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분연히 결단해서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요약하자면, 조약을 그대로 둘 경우 황제 당신의 일도 없어질 터 어서 빨리 조약을 폐기하고 조약체결에 간여한 대신들, 즉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요구다. 이 상소에 고종은 아래와 같이 답했다.
어제 내린 비답에 이해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이렇듯 재차 들고 나설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이처럼 크게 벌일 일이 아니고 또 요량해서 처분을 내릴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고 서로 거느리고 물러나 즉시 집으로 돌아들가라.
위에서 볼 수 있듯 고종은 조병세의 상소를 묵살한 채 내가 다 알아듣게 이야기했건만 또 뭔 소리냐며 집에나 돌아가라고 했다. 위 사료에서 고종은 조약의 폐기나 을사오적을 처벌하려는 의사가 일도 보이지 않는다. 서명만 안했을 뿐 공범이나 다름없는 자세다. 어떻게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드라마 속 고종황제와는 전혀 딴판이다.
위 기사는 고종실록(국사편찬위원회 DB)의 기록이다. 일제강점기 실록 편수자들의 악의적 왜곡이었을까? 그럼 1차사료 승정원일기는 이 날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실록은 양력을 기준으로 했고 승정원일기는 음력을 기준으로 했다. 1905년 11월 27일은 음력으로 1905년 11월 1일이다. 이날 승정원일기(국사편찬위원회 DB)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宮內府特進官趙秉世等疏曰, 伏以臣等憂憤所迫, 妄陳愚衷, 聚首俟命, 惟伏承商量措處之批, 而快兪尙靳, 尤不勝憫迫鬱抑之至。 竊以爲宗社存亡在此, 陛下安危在此, 臣民生死亦在此, 誠宜奮發振勵, 先斬賣國諸賊, 以謝天下, 仍卽聲明各館, 會同談辦, 則刼約可廢, 國權可復。 若或因循顧瞻, 拖過時日, 則呼吸之間, 陛下事去矣, 陛下事去, 則宗社臣民, 將置何地乎? 此臣等所以搥胸塡臆, 仰首申暴, 而不知止者也。 伏乞皇上, 廓揮乾斷, 亟降處分焉。批旨, 省疏具悉。 昨日之批, 有可以諒會者, 而至于此再擧, 則萬非所圖也。不必如是張大, 而亦且有商量處分矣。 卿等其諒之, 相率退去, 卽爲還第事。
번역하기 귀찮으니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 번역 DB를 이용하자.
○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근심과 울분이 북받쳐 망령되이 어리석은 마음을 진달하고 머리를 맞대고 명을 기다렸는데 삼가 헤아려 조처하겠다는 비답은 받들었으나 흔쾌히 윤허해 주지 않으시므로 더욱 답답하고 울적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종묘사직의 존망存亡이 여기에 달려 있고 폐하의 안위安危가 여기에 달려 있으며 신민臣民들의 생사生死도 여기에 달려 있으니, 참으로 분발하여 떨치고 일어나 먼저 매국賣國한 역적들을 베어 천하에 응답한 다음 이어 즉시 각국 공관公館에 성명聲明을 내고 회동會同하여 담판을 짓는다면 강제 조약이 폐기될 수 있고 국권이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머뭇거리며 눈치만 보면서 시일을 질질 끈다면 순식간에 폐하의 사업이 사라질 것이니, 폐하의 사업이 사라지면 종묘사직과 신민이 장차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들이 가슴을 치고 오열하면서 멈출 줄 모르고 성상께 거듭 토로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단호하게 결단하시어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어제 내린 비지를 보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다시 상소를 올리다니 전혀 할 도리가 아니다. 굳이 이와 같이 크게 벌일 일도 아니고 또한 잘 생각해서 처분할 것이니 경들은 그렇게 알고 서로 이끌고 물러가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승정원일기의 내용은 고종실록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병세가 계속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다음과 같은 조령을 추가로 내렸다.
“반복해서 타이른 것이 서너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의당 깨달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갈수록 더 굳게 버티어 이렇게 지루하게 하니, 사체로 볼 때 자못 이치에 어긋난다. 특진관 조병세(趙秉世)와 이근명(李根命)에게 모두 문외출송(門外黜送)의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고종은 이런 황제였다. 며칠 뒤 민영익이 자결을 선택했고 이해 12월 상소의 주인공 조병세도 목숨을 버렸다. 결국 1910년 조병세가 걱정했던 세 가지, 종묘사직의 존망, 폐하의 안위, 신민의 생사 가운데 결국 폐하의 안위만 남았다. 일본 천황으로부터 왕공족이란 우대 신분을 받고서 말이다.
고종은 을사늑약 이후 밀조와 밀사의 형식으로 러시아, 미국 등 외국과 접촉해 을사조약의 취소를 시도했다. 또한 의병활동을 독려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표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고종은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 범위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진행했다. 또한 김옥균을, 김홍집 등과 달리 이완용, 박제순 등에게는 고종의 칼날이 닿지 않았다. 오히려 국권피탈 이후까지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고종의 행동이 일본에 의해 발각되었을 때, 그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국권피탈 후 대한제국 구 황제가 "왕"의 호칭를 획득할 수 있었던 건 이완용의 노력이었다.)
고종, 순종실록은 세계기록유산에서 제외되었다지만 승정원일기는 1910년까지 전권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세계기록유산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가 속속들이 기록되어 있다. "고종, 순종실록은 못믿겠다" 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악행은 감추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이렇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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