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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본문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3.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의친왕이 독립선언을?
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요?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의친왕이 서명(?)했다는 "제2독립선언서"의 진실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대동단 독립선언서 사진을 게재하고 아래 설명을 부기했다.
“대동단 독립선언서. 일제 치하에서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에서 평민이 되고자 했던 의친왕은 독립선언서 33인 중 제일 첫 번째로 ‘의친왕’이 아닌 ‘이강’으로 서명을 한다. 전협, 김가진 등 당대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서명을 하였다. 대한황실의 황족이었던 의친왕은 독립선언서에 1919년을 대한민국의 원년으로 기재하고 있다.”
일단 먼저 지적할 것은 본문 뒤 나오는 “李堈(이강)”은 성명이지 서명이 아니다. 본문 포함 모두 한 사람의 필체다. 따라서 뒤에 나오는 이름도 보문 작성자의 기록이다. 따라서 이 자료만으로 이강이 여기에 서명했다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이 사진의 독립선언서는 사진으로 볼 때 강필등사본鋼筆謄寫本으로 보인다. 유지에 강필로 긁어 써서 등사판에 고정한 뒤 종이를 한 장씩 넣고 잉크를 묻힌 로울러로 밀어 찍은 것이다.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소량 인쇄물 제작 시 널리 사용했다. 의친왕 망명을 도왔던 정희립은 신문조서에서 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판으로 인쇄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진의 독립선언서가 원본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본문 끝에서 3번째 줄에, “邁進(매진)할 뿐이로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1930년 2월 공포한 언문철자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뿐의 ‘ㅃ’은 ‘ㅅㄷ’으로 표기했다. 기미독립서나 당시 신문(아래 사진 참조)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유인물은 훗날 대동단의 의거를 기념해 재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 원본에는 이강의 서명이 있었을까? 의친왕 이강은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 서울로 압송되어 총독관저에서 조사를 받았다. 검찰에 출두하지 않은 것은 왕공족의 특권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때 심문을 담당했던 모리 로쿠지(森六治) 경부는 이강에게 집요하게 질문했다. 독립선언 관련 인쇄물도 그 대상이었다.
(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라고 서명한 「유고諭告」라는 글을 인쇄하였는데, 알고 계십니까.
(답) 그것은 기억에 없는 일이다.( 夫レハ覺ヘハアリマセン. ) 김춘기金春基로부터 강석룡姜錫龍이 제2회 독립선언서인가에 나의 명의를 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것은 괘씸하다, 내가 적어도 서명했다면 당당하게 할 터인데 승낙도 받지 않고 이름을 도용한 것은 못된 짓이다”라고 질책했더니 그 뒤 배부를 중지했다는 데, 나는 본 일이 없다.(自分ハ見ダコトハナイ.)
(문) 그것은 몇 일경의 일입니까.
(답) 이달 초순에 두세 번 들었는데, 그때 그런 것을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한 짓을 하면 빨리 갈 줄 생각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한 일도 있었다. 또 나를 9일 데리고 북문北門 밖으로 연행해 갈 때 전협全協은 나에 대해 무엇인가 각 단체의 이름으로 인쇄하여 배부할 서류가 있는데 전하께서 오시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유고諭告는 독립신문에 보냈다는 글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친왕은 기억에 없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제2회 독립선언서가 있다고 말하며 그것은 자기 명의를 함부로 도용한 것이라며 괘씸하다고까지 했다. 조서 내용을 보면 의친왕이 망명 또는 독립선언서 배포에 일정부분 간여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실패하자 전혀 본인의 뜻이 아닌냥 변명으로 일관했다. 또 전협이 한 일이라며 고변했다. 이는 앞서 1차 신문내용과도 궤를 같이 한다.(1차 신문에서 이강은 대동단원의협박에 끌려온 것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결국 전직 의친왕, 이강공의 증언에 의거하여 대동단 사건의 관련자들은 처벌받았다. 의친왕은 처벌을 면했으며 이후 이 사건 관련자들과 어떤 만남도 갖지 않았다. 주모자 전협이 감옥에서 고통받다가 산송장이 되어 풀려났을 때도, 이어 며칠 뒤 사망해 미망인이 장례비를 걱정할 때도 의친왕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의친왕을 숭모하는 이들은 이 기록도 조작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제가 조작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 이강의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건 의친왕 전하 자신이었다. 이 심문조서의 뒤에는 성명 이강과 그의 자필 서명이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없던 이강의 서명이다.(아래 사진 참조)
이강은 본인의 이름이 열거된 독립선언서를 이렇게 말했다. “기억에 없는 일이다. … 괘씸하다. … 승락하지 않은 것을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 … 나는 본 일이 없다.”
대동단원들을 다 팔아넘기고, 스스로 하지 않았다는데, 이 어찌 공적이라 할 수 있을까. 내용도 잘 모르면서 나랏돈으로 일가의 숭모 사업을 하겠다는 세종특별자치시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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