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의친왕의 축첩 본문
의친왕은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도 여성과의 염문설에 그 때문에 미국인 청년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후궁과 첩을 구분하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부인 1인, 후궁 7인, 첩 8인이라고...(기준을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군주제 시대에는 달리 봐야 한다"라고. 하지만 "근대"다. 근대에는 그것을 "축첩(쌓을 축, 첩 첩)"이라고 부른다. 의친왕은 일제강점기 막판까지 후궁인지 첩인지 늘려나갔다. (일관성은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과, 여기에 더해 기생까지 - 어떤 자료에는 일본인 첩도 있었다고.)
어떤 이는 의친왕이 축첩을 15세기 세종에 비교하며 왕실의 여성편력은 다르다고 강변한다. 어불성설이다. 세종의 시대를 우리는 중세, 또는 근세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친왕이 살던 시대는 20세기 아닌가?
뭐 고종도 근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할 수 있으니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 "대한국국제"를 한 번 읽어보라. 어디에 근대가 있나? 근대로의 이행을 위해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귀중한 시기에 즉위 40주년 기념 파티에 몰두했나. 커피 마시고 전기 놓고 전철 깔았다고 근대가 아니다. 커피는 본인이나 마셨고, 전기는 건청궁에 놓았고, 전철은 민비 무덤 간다고 "홍릉"까지 깔지 않았나. 무당 진령군을 말을 듣고 조정의 인사를 단행하고, 개화한다며 단발령은 내려놓고 정작 본인과 아들은 상투 안 자르고, 만민공동회로 시민의 공의라는 것이 싹을 피울 무렵 황제권을 위협한다고 때려잡고, 여기에 근대가 어디 있는가?
*의병 봉기 독려했다고 하는데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근대 무기로 무장한 자기 군대로는 아무 것도 못 하고, 시골 촌로, 산골 포수 들을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라 하는 일본군의 총칼에 내몬게 잘한 걸까? 의병은 현창해도 고종은 잘했다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의친왕의 축첩으로 돌아와, 근대 군주 누가 그리 당당하게 축첩을 했던가? 술탄들의 할렘을 비난할 일이 아니다. 16명의 여성을... 그들이 "근대"군주라고 불릴 자격이 있던가? 그리고 군주제? 나라는 망했는데 무슨 군주제인가? 이왕직이라서, 공가라서?
의친왕은 그냥 "야만적인 축첩"을 했을 뿐이다. 손병희가 창간한 천도교 잡지 개벽에서도 그것을 일갈하였으니, 1924년에 "색색형형의 경성첩마굴, 가경가증할 유산급의 행태"에 잘 나온다. 미화할 걸 미화해야지... 기사 그대로 ‘가경가증’스러울 뿐.
"마지막으로 이왕가 왕족들은 어떠한지 좀 말하고 그만두자. 이씨 가운데 이강공은 다 아는 일이니 다시 논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지용, 이재각, 이해승, 이재극 등 여러 사람이 다 남 부럽지 안게 한참 첩 놀이를 잘했다. 그러나 그 중에 가련한 이는 이재극 남작이오, 또 왕족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은 이윤용 남작이었다. 진정 이른 바 제것 두고 못 먹는 것은 왕장군의 고자라고, 두 사람은 재사노 다소 있지만 첩으로 호의호식은 고사하고 첩으로 인해 배를 쫄쫄이 굶었다. 즉 이재극 남작은 그 첩 신영월에게 재산권을 다 쥐어주고 이윤용은 유명한 산월마마의 유언으로 얻은 침모 첩에게 재산권을 빼앗겨서 돈 한푼도 마음대로 못쓰고 반찬하나 잘 먹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를 대하면 한숨을 풀풀 쉬면서 첩으로 호강하는 놈은 다 얼빠지고 남의 속 모르는 놈이라고 스스로 한탄만 한단다. 이 사람들아~ 언제는 첩 얻어가지고 배가 부를 줄 알았던가. 늙어서라도 깨달은 것이 낫네 그려." - 원문을 현대어로 풀어씀.

'이왕가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제국 태자태사 문충공 이토 히로부미 (0) | 2025.03.02 |
---|---|
The 16 Wives of Prince Uichin: A Disgrace to Modernity (0) | 2025.02.28 |
유사역사학의 산물: 고종독살설, 제국익문사 (0) | 2025.01.18 |
을사늑약 폐기를 요구하는 신하들에게 집에나 가라던 고종 황제 (17) | 2024.12.24 |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1) | 2024.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