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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칙명으로 의병장 민긍호를 욕되게 하는, 의친왕 이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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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칙명으로 의병장 민긍호를 욕되게 하는, 의친왕 이강

자불어 2025. 3. 2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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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원주에서 민긍호 의병대장 기념사업회 발대식이 있었다. 이때 의친왕기념사업회는 고종황제가 민긍호 의병장에게 내린 칙명을 공개했다. 기사 전문은 아래 링크한다.

‘민긍호 의병장 임명’ 대한 황실 밀서 최초 공개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하던 원주진위대 특무장교 민긍호 의병장(1865-1908)을 간부급 의병장으로 임명한 밀서가 공개됐다.민긍호의병대장 기념사업회(회장 조경빈)는 지난 22일

www.kado.net

칙명의 사진은 다음과 같다. 

의친왕기념사업회가 갖고 있다는 가짜 칙명

勅命 / 閔肯鎬特陞正 / 三品通政大夫 / 命鎭衛隊倡義 / 司令部大將者 / 光武十一年九月五日
위 칙명을 그대로 해석하면, “칙명 민긍호를 정삼품 통정대부로 특승하고 진위대창의사령부대장을 명한다”라는 뜻이다. 위 칙명에는 문산관(정3품 통정대부)과 실직(진위대창의사령부 대장)을 동시에 임명한 것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이 칙명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의친왕기념사업회 수장고에 보관되어온 59.2x39.1cm 크기의 이 문서는 ‘칙명 민긍호 특승정 삼품통정대부 명진위 대창의 사령부 대장자 광무 11년 9월 5일’이라고 적혔다. 칙명은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가 내리는 황실 임명장을 이른다. 광무 11년은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 황제의 연호를 매겨, 1907년 9월 5일에 해당된다. 이 사무총장에 따르면 ‘1907년 9월 5일 당시 원주진위대 특무정교 민긍호를 정3품 통정대부로 특별승급하며, 대한제국 진위대 창의사령부 대장으로 봉무할 것을 황제가 명한다’는 내용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이 밀서는 고종의 둘째 아들이자 순종의 동생으로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었던 의친왕이 대한 황실 직속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 요원을 파견, 민긍호 의병장에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강원도민일보 기사 가운데)


그러나 이 칙명은 가짜다.

일단 바로 동 시기 두 개의 칙명을 놓고 보자.

(좌) 의친왕기념사업회 칙명 / (우) 육군보병참령 박승환 칙명

1. 형식: ‘勅命(칙명)’ 대개 우측 상단에 쓰는 것이 원칙이다. 종종 본문 중간 정도에 위치한 것도 보이지만 형식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칙명이라면 당연히 문서 양식에 의해 작성한 것이어야 한다. 아래는 갑오개혁기 이래 써온 칙명 형식이다. 1897년 칭제했으므로 연호는 개국에서 광무로, 대군주의 어새는 황제의 어새로 바뀐다.  

김건우, 갑오개혁기,대한제국기의 사령장 관고(官誥)에 관한 연구, 고문서연구26(2005), p.59.

2. 서체: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수준의 필체다. 먼저 위 두 건의 칙명을 비교해보자. 그리고 주변에 서예하는 분이 있음 여쭤보시라. 밀지라고 해도,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저리 조악한 글씨를 내놓을 순 없다. 공명첩지 수준도 안 되는 글씨로 밀명을 내렸다는 건 이해 불가다.(더군다나 황실에서)

3. 인장: 칙명에는 보통 칙명지보를 찍는다. 물론 아닌 경우도 꽤 있다. 그러나 저 인장은 이상하다. 스스로도 이상했는지 이영주 의친왕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황제어새(밀지에 사용한 옥새)라고 설명했다. “황제어새”라는 것이 실제 실물로 존재한다. 황제가 사용한 도장의 일람인 <보인부신총수>에도 누락되어 있어 국가유산청 등에서는 황제의 밀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황제어새는 정방형이다. 희미하게 보이지만 저 칙명은 정방형이 아니라 세로가 더 긴 직방형이다. 저 칙명에 찍힌 도장과 다르다.(잘 보이지 않지만 여러모로 다르다.)

4. 산관: 산관은 실제 직무가 없는 품계를 표시하는 관직이다. 문산관과 무산관으로 나뉘는데 통정대부는 문산관 정3품이다. 꽤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 말기 이후 “통정대부”는 그냥 주는 관직이다. 황태자의 생일, 황제가 기로소에 들어간 날 이런 때마다 펑펑 나눠주고, 더러 정부가 나서서 팔기도 했다. 그런 허명(虛名)의 산관을 특무정교를 역임한 민긍호에게 “특승(特陞, 특별히 승급함)”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 국권피탈 이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직접 황실의 직첩을 만들어 다닌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 종종 “특승”을 쓴 것이 보인다. 이 조서는 그것을 모델로 조작한 모양이다. (당시 조작했던 것은 대부분 원형 사인私印을 찍었다. 즉, 이는 위 칙명이 여러 모델을 바탕으로 최근에 조작한 것임을 방증한다.)

5. 장군호: 민긍호가 이끌던 부대는 “진위대사령부”였다. 진위대를 총괄한다는 뜻이다. 만일 여기 ‘창의’를 붙인다면 “진위대사령부 창의대장”이었을 것이다.

6. 일자: 광무11년(1907) 9월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 고종이 퇴위했기 때문에 융희원년 9월이다. 물론 고종은 강제로 양위했던 까닭에 순종의 즉위도, 새로운 연호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의친왕기념사업회는 의친왕이 고종의 명을 받아 제국익문사 요원을 보내 이 칙명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일까? 아래 신문에서 볼 수 있듯, 의친왕은 군대해산 발표 하루 전인 1907월 7월 31일 일본으로 피서를 떠났다. 그리고 그해 12월 7일에야 부산으로 돌아왔다. 다시 말해 칙명의 작성 시점, 즉 "1907년 9월 5일"에 의친왕은 일본에 있었다. 이미 떠난 지 한 달도 더 된 시점이다. 일제의 감시 속에 자료 하나 남기지 못했다던 엄혹한 시기에 일본에서 고국에서의 의병 거병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께 카톡이라도 보낸 것일까? "아버지 저예요, 원주 거병 소식 들었어요. 칙명하나 만들어 제국익문사 요원 통해 보내주세요."(???)  설령 이런 유형의 칙명이 오고 갔다고 해도 고종이 직접 했으면 했지 일본에 있는 의친왕을 통해 했겠는가? 그들은 신소설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우연을 가공해 역사인 듯 말한다. 의친왕은 이 칙명과 무관하다.(물론 진품도 아니다.) 위조를 하려면 일단 의친왕의 동정부터 살폈어야 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31일자 / 1907년 12월 8일자

1907년 11월 강원도관찰사가 태황제와 황제의 명을 받아 무기를 버리고 의병을 해산하라 회유하니 민긍호는 이렇게 물었다. "태황제 폐하와 대황제 폐하께서 정말로 위에서 자의로 그 일을 결정하시고 전하셨으며, 그 전하신 뜻을 실제로 받드신 것입니까?"  만일 이 칙명이 전달되었다면 이런 질문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의병은 누군가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설령 구국의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남의 힘을 빌려서,  더러 조금의 의심이라도 사게 되면 “난 아니오”에 "바로 저놈이오"로 일관했던 황실의 무리들과는 다르다. 결국 황실은 나라만 잃었지만 재산은 건졌고, 그들은 나라도 목숨도 잃었다. 

7. 마지막으로 칙명은 수여로 그 소임을 다한다. 그런데 그게 왜 의친왕기념사업회 수장고에 있는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누구에게 구입한 것인가? 설마 의친왕의 공적을 날조하고자 직접 제작한 건 아니겠지...)

민긍호의 사적은 널리 알려졌다. 굳이 의친왕을 엮지 않아도 그 공훈은 빛난다. 그러나 의친왕은? 본인의 사적은 상해 망명 기도사건 그것 하나뿐이다. 게다가 사실을 살펴보면 그나마도 미화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 까닭인지 의친왕을 숭모하는 자들은 의친왕의 공적을 가공해내려 여기저기 끈을 대려고 한다. 심지어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속여 의병을 양성했다는 거짓말까지 일삼는다. 그러나 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가짜 칙명은 선을 넘었다. 일본의 왕공족으로 호의호식하며 선물 받은 "프랑스제 인형"을 부여잡고 반성해도 모자를 마당에, 이런 조잡한 가짜 문서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며 혹세무민하지 않기를 바란다. 민긍호 의병장의 빛나는 사적에 먹칠하는 것이야 말로 반민족 친일행위가 아니면 무엇이랴. 진정 민긍호 의병장을 기리고자 한다면 민긍호 의병대장 기념사업회는 항의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의친왕이 "수많은 독립운동을 했건만 종이 쪼가리, 증좌 하나 남기지 못했다"던 그 시기, 한 잡지는 아래와 같이 민긍호 대장을 기렸다. 의친왕을 필두로 이왕가와 조선귀족의 축첩질을 일갈했던 바로 그 잡지다. 

비절장절悲絶壯絶한 민대장閔大將의 약사畧史

정미년 조선朝鮮군대 해산 시에 원주原州에서 일어난 의병 대장 민긍호閔肯鎬라 하면 누구든지 대개 기억할 것이다. 그는 원래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 사람이었다. 육군 정교正校로 고성高城 진위대鎭衛隊에 봉직하얏다가 결국 고성대高城隊가 폐지돼야 원주 진위대에 합군合軍하게 됨에 그도 또한 원주로 전근하얏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지개志槪가 잇는 강개慷慨의 군인이다. 당시 한국韓國의 군대가 모도 부패하야 병졸과 위관을 막론하고 일야주색日夜酒色 도박 등을 일삼되 특히 민씨閔氏는 성질이 엄격하고 군대의 기풍을 확수確守하야 주사청루酒肆靑樓에 족적을 들이지 안이하니 민씨閔氏의 부하는 물론이고 그의 상관이라도 항상 기탄忌憚하얏섯다. 이 같이 원주영에서 2개의 성상을 지내다가 마참 정미년 6월에 군대 해산하는 기회를 당하얏다. 군부에서 해산 명령이 내려오자 경성, 충주에 잇는 일병日兵은 원주영을 암습하야 군기軍器를 점탈占奪하랴고 출동한 중이엿다. 그때 원주의 군대는 800여 건아가 잇고 또 참령叅領이하 다수의 장관將官이 잇섯다. 그러나 감히 일언一言의 이의 하나를 하는 자가 업고 다만 안색이 흙빛이 되어 호상고면互相顧眄할 뿐이엿다. 이때 민씨는 당당히 출반하야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언론言論을 하고 상관에게 배성일전背城一戰하기를 원하얏다. 그려나 무용무의無勇無義한 상관들은 군명君命이 잇스니 망동妄動치 못한다고 거절하얏다. 이에 민씨는 분기가 하늘을 찔러 허리의 장검을 뽑고 질책하기를, 장차 재외에 군명君命은 유소불수有所不受(받을 수 없음)일 뿐 안이라 게다가 대군주大君主가 외인外人 협박을 이기지 못하여 비상非常의 해산령을 내리신 것은 노상소아路上小兒가 다 아는 바이라. 그대들이 장관將官으로 누세국은屢歲國恩을 수受하다가 위급존망危急存亡의 추秋에 제際하야 속수취박束手就縛을 좌대坐待하니 이는 국적國賊이라 하고 일군一軍을 호령하니 감히 응종應從치 안이하는 자가 업섯다. 이에 6월 27일(양력 8월 5일)에 궐연蹶然이 의기義旗를 거擧하야 스스로 의병 대장이 되고 사방에 전격傳檄하얏다. 민씨는 원주에서 3일을 유진留陣하다가 인읍隣邑 영월寧越로 이진移陣하얏스니 이것은 원래 원주가 사면수적지지四面受敵之地인 고故로 지세가 방어에 불리하고 또한 원주에서 교전하면 원주 인민이 참화를 당할 것을 고려한 것이다. 그후 민씨는 충주 제천 등지로 출병하야 일병日兵과 누차 교전하야 다소의 공을 이루었으나 원래 훈련이 젹은 오합烏合의 병졸이오 또한 군기軍器, 병량兵糧, 병력兵力이 미약하고 본 즉 비록 용장勇壯하고 용병用兵의 기능이 잇는 민씨라도 기세其勢를 장구長久히 유지키 어려웠다. 제천에서 패배한 후 다시 영월로 퇴진하야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계획하얏다. 그때 강원도江原道 선유사宣諭使 홍우석洪祐晳은 민씨의 귀화歸化하기를 백방으로 권유하얏스되 민씨는 단부청종斷不聽從하고 부하 수십 인과 같이 영월군 수주면水周面 월현月峴(舊 원주군原州郡 등자현登子峴)에 은복隱伏하야 시기를 잠규潛窺하고 잇섯다. “시불리혜내약하時不利兮奈若何”리오. 대구경찰대는 이를 탐지하고 암중래습暗中來襲하야 민가에 방화하고 난총亂銃을 쏘았다. 일이 여기에 이르매 민씨는 뜻志를 결決하고 촌전村前에 돌출하야 큰소리로 이르긴, 민긍호가 이에 잇스니 무고한 양민을 살해치 말라 하고 자진취박自進就縛하얏다. 의기義氣의 남자가 아닐 것 같으면 이 때 민씨는 자기 생명만 위하야 도주하고 다수한 촌민의 참해를 불고不顧하였을 것이다. 민씨는 경찰대에 포박되야 각림리覺林里에서 무한한 고욕을 당하는 중에 민씨의 부하병은 씨를 구하랴고 승야래습乘夜來襲하다가 다수한 사상이 나고 씨도 또한 난군亂軍 중에서 피해被害하니(죽임을 당하니) 오호嗚呼- 때는 무신戊申 정월 이십팔일이다.(1908년 2월 29일) 원주수비대는 이로부터 고침안면高枕安眠하고 대구경찰대는 대상大賞을 수受하얏다. 그러나 의간충담義肝忠膽은 목석이라도 다 감동하는 바이라. 원주수비대는 민씨의 의義를 칭상稱賞하야 관곽棺槨과 수의繡衣를 갖춰 당지 인민과 상의하야 북문北門 외(현재 원주면原州面 누문리樓門里)에 후장厚葬하니 그때 원주성 중의 인민은 남녀아동을 막론하고 눈물을 뿌리지 안이한 자가 없었고 씨의 영여靈輿는 씨의 원부하병元部下兵으로 잇던 장정이 지원하야 호송하얏다. 씨의 애첩은(성명 미상) 원래 화류계 출신이지만 또한 씨를 위하야 3년간 절節을 수守하고 씨의 유택은 지금까지 원주의 명망가 안윤옥安允玉씨가 수호한다.(개벽 42호, 1923. 12.)(개벽 42호, 1923. 12.)

고종과 의친왕에게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그건 가치 판단의 문제다. 그 선택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진위는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행사를 대국민사기극으로 만든 거다. 국가보훈부와 광복회, 원주시는 국가유공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이런 가짜 행사를 엄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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