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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란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본문

이왕가 사람들

‘경무대’란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자불어 2025. 4. 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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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씨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승만 정권은 칠궁 내 전각을 헐고 경복궁의 '경'자와 신무문의 '무'자를 결합하여 '경무대'를 설치해 자신의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습니다."

경무대景武臺는 경복궁의 후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썼던 말이다. 다음은 그 증거다. 

1. 은대조례銀臺條例: 이 책은 승정원의 업무편람 같은 서적으로 흥선대원군의 명에 의해 작성한 것이다.
"황단皇壇" 조에 "명나라 세 황제의 기신일에 북원北苑에서 망배례를 거행할 때에는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예를 행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북원'의 각주에 "경무대景武臺다."라고 했다. 


2. 각사등록各司謄錄: 대한제국기까지 중앙-지방을 오간 공문 모음집이다.
강원감영관첩江原監營關牒 고종6년(1869) 11월 15일에, "의정부議政府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올해 11월 초7일 경무대景武臺에 입시入侍했을 때" 라는 표현이 나온다. 

3. 향산집響山集: 국권피탈 소식에, 어느 집안이 호의호식할 때 단신 순국한 이만도(李晩燾, 1842~1910)의 시문집이다. 
"신미년(1871) 3월에 또 이전의 직책으로 돌아갔다. 상이 자경전慈慶殿에 납시어...(중략)... 얼마 뒤 경무대景武臺에서 상이 친림하여 행한 응제(應製)에 입시(入侍)하였을 때"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한제국 때도 경무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경복궁이 버려진 궁궐이 된 터라 경무대는 종종 운동회장, 야유회장으로 사용되었다. 

4.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13일
(궁내부 운동회) 궁내부 관리들의 운동회는 오는 일요일에 경복궁 대궐 안 경무대에서 할 터인데 기악도 있다더라.

일제강점기에도 처음엔 운동회장으로 썼다. 1939년 이곳으로 총독관저를 이전하면서 건물이 들어섰다.

5. 매일신보 1939년 11월 5일
(총독관저의 낙성을 피로) 경무대를 앞에 놓고 멀리 장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총독부 뒤의 새로운 총독관저는 지난 9월 23일 이리로 이사를 하였는데 시국이 다단한 때이라 아직껏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던 중 어제 3일의 명치가절明治佳節을 맞이한 것을 기회로 오늘 4일 오후 2시부터 간단한 다화회의 형식으로 이를 공개했다. ...(중략)... 이날 다화회에는 윤덕영 대제학... 등 관민 600명이 참석하여 국화향기도 높은 중에 축배를 들었다. 

해방 뒤에는 미 군정장관 관저로 썼다. 

6. 경향신문 1947년 9월 18일
(김박사 하(지) 중장 요담) 조선문제를 단요하여 국제정세가 자못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작금 국내정계의 대부분은 공위(공동위원회) 성과에 대한 기대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독립 방도를 개척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데 김규식 박사는 16일 오후 7시부터 경무대로 하지 중장을 방문하고 11시 반까지 약 4시간 여에 걸쳐 회담을 하였다 한다. 

그 뒤 대통경 관저로 쓰인 것이다. 

모르는 데 말했다면 경솔한 것이고, 알면서 그랬다면 교활한 것이다. '경무대'란 이름을 이승만이 지었다는 건 무식의 소치를 발로하는 것이니, 만일 집안의 구전, 즉 누군가 그리 이야기했다면 역사에 무지몽매한 자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 때 칠궁 권역을 훼손했다는 증거는 '일도'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 전에 전 의친왕 이강이 사동궁을 팔아치웠으니 사동궁으로 못 돌아온 건 당연지사. 뻔한 기록이 있는데도 그런 이야기를 믿는 건, 중국인들이 선거에 간여했다며 열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매일신보 1933년 5월 25일자 - 총독관저 이전 전까지 운동회장으로 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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