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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태자태사 문충공 이토 히로부미 본문

이왕가 사람들

대한제국 태자태사 문충공 이토 히로부미

자불어 2025. 3. 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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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일본 이상 당혹스러워했던 건 대한제국 조정이었다. 어떤 자들은 일말의 근거도 없이 안중근이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대한제국에 대한 환상과 조상 현창에 눈먼 이들의 소설에 불과하다.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황태자(영친왕)의 스승이 되어 달라며 태자태사의 벼슬을 내렸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이기도 했다. (그 전에 고종은 부디 한국에 남아달라며 간청하기도 했다.) 순종은 태자태사의 죽음에 조서를 내렸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영령(英靈)의 기질을 타고나 광제(匡濟)의 계략을 갖추고서 시운(時運)을 만회하고 문명(文明)을 발전시키려 현로(賢勞)를 꺼리지 않았고 자신의 훌륭함은 돌보지 않은 채 우뚝이 동양(東洋)의 지주(砥柱)가 되었다. 일찍이 평화 대국(平和大局)으로 주관(主觀)을 삼았으며 더욱 한일(韓日) 관계에 정성스러워 연전부터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위간(危艱)함을 붙들어 구제하였기에 홍대(弘大)한 계책을 오로지 의지하였다. 지난번 통감(統監)으로서 궐하(闕下)에 항상 머물러 있어 때에 따라 나아와 면회하면 정성을 다해 계옥(啓沃)하였고, 곧 태사(太師)의 임무를 받아 우리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여 예학(睿學)을 진취시킴에 있어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길에 동반(同伴)하여 순람(巡覽)한 나머지 피로가 미처 가시지도 않았다. 그런데 잇달아 만주(滿洲)의 행차가 있었으나 오히려 예정한 날짜대로 잘 돌아와서 길이 의지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어찌 불측(不測)한 변이 생길 줄이야 뜻하였겠는가? 놀라운 부음(訃音)이 갑자기 이르매 슬프고 애석한 마음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고(故) 이등 태사의 상(喪)에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을 특별히 보내어 치제(致祭)ㆍ회장(會葬)하도록 하고 장수(葬需)는 궁내부로 하여금 수송하게 하며, 특별히 문충(文忠 덕을 말하고 학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국가를 생각하고 가정을 잊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이란 시호를 내린다.” [승정원일기 순종 3년 기유(1909) 9월 15일(신유, 양력 10월 28일 목요일)-고전번역원DB]

혹자는 이 기록은 일제 때 편찬한 순종실록 기사로 믿을 바 못된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위 기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승정원일기에 담긴 내용이다. 내용의 유불리에 따라 진위를 가름하는 것은 유사역사학에서나 하는 짓이다.  

승정원일기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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