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위키를 보니 의친왕 숭모자들이 열일한다 생각했고 또 역사학도로서 이런 거짓역사를 술술 풀어내는데 방관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나무위키 "의친왕" 항목의 언설은 다소 교묘한 부분이 있다. 최근 이 블로그에서 의친왕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언급하니, 그걸 그대로 쓰되, 슬그머니 양쪽을 모두 검토해야 한다는 식의, 또는 일제의 기록이니 신뢰할 수 없다로 일단락지음으로 써 객관성을 확보한 척하더라. 그러나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마치 몇 년 전 누군가가 떠들어대듯 대륙 조선설도 일종의 학설이니 공공역사에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했던 말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신문조서를 보면 이강공(전 의친왕)은 끌려간 것일 뿐이며, 독립선언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지들끼리 제멋대로 꾸민 일이라고 했다. 나무위키 역시 신문조서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러나 결론은 이렇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일본 측의 수사 기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 데다가, 적어도 그의 탈출에 임시정부가 개입된 건 확실해 보인다."
일부 재야사학자, 음... 그래도 사실을 조작하고 날조해 조상 미화에만 천착하는 조상숭배자보담은 낫지 않은가? 그런데 이리 이야기하고 싶거든 그 재야사학자가 누구이며 주장은 무엇인지 각주를 달아야 한다. 근데 더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그러나 그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 데다가"란 대목이다. "맞지 않는다"고 하려면 무엇이 사실과 맞지 않은 지 적시해야 한다. 이렇게 퉁치고 넘어갈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 글을 쓴 자, 그자는 신문조서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학문적으로 게으른 데다 정보를 오염시키는 자다. "역사"라는 이름을 거론할 자격도 없는 자다.
일제가 신문조서를 조작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심지어 신문조서에는 전 의친왕 이강 공 본인의 자필 서명까지 있다. 더구나 이건 비밀 문서로 광복 후에야 열람할 수 있었다. 일제가 의친왕을 모해하려 했다면 비밀로 두었을까? 매일신보나 경성신문 같은 기관지로 대서 특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리 놔두었다. 이왕가는 식민지의 으뜸가는 모범백성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수사기록을 비밀로 취급했기에 의친왕은 해방 후 “독립운동 운운” 타이틀을 갖고 갈 수 있었다.
의친왕 숭모자들이 나무위키에 저지른 가장 지저분한 행동은 다음과 같은 순환 논법이다. 나무위키의 글을 다시 인용한다.
“반면, 이우의 생모에 대해서는 꽤 정보가 남아있는 편인데, 이해경의 인터뷰에 따르면, 의친왕이 인력거로 기생을 부르는 척하고, 독립투사들을 그 인력거꾼으로 꾸며 여러 독립운동 기밀들을 전달했는데, 그 일을 이우의 생모이자 측실 수인당 김씨가 도왔다고 한다.”
이 글을 액면 그대로 읽어보면 후손 중 가장 어른이 되는 의친왕의 딸 이해경이 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해경은 이른 바 "마지막 왕녀"로 사동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읽는 이들에게 더 신뢰를 주었을 것이다. 이 글의 문장 뒤 각주에는 이해경의 인터뷰(중앙일보, 2011.6.4.) 기사가 링크되어 있다. 그럼 실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자.
“그전에는 조선 후기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일하면서 도서관의 고서를 읽고 배웠죠. 아버지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시려고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사동궁에 연금되기도 했어요. 아버님이 가장 오래 함께한 후실이 수인당입니다. 그 자손이 해준 얘기인데, 아버지가 궁에 기생들을 들일 때, 기생들이 타고 오는 인력거꾼이 독립투사였대요. 그리고 뒷방에서 그들과 독립 투쟁 논의를 하셨다고 해요.”
"기생을 태운 인력거꾼" 이야기는 이해경의 증언이 아니다. 이해경 역시 "수인당의 자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이해경이 언급한 수인당의 자손이 누구일까? 이건 자신의 주장에 합리성을 뒷바침하고자 마치 다른 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한 듯 자기 이야기를 쓴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자가발전한 것이다. 아마 학계였다면 바로 퇴출 수순이었을 일이다.(물론 제자들 줄줄이 거느리고 있는 유명 "교수"는 예외가 될 수도 있다. 그 집단, 학맥 모두 부끄러워 해야할 일이다.) 역사 자료, 공공역사를 오염시키는 자들은 바로 이런 자들이다. 수인당의 자손은 직접 말하라. 그리고 그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구전이 구라가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 이야기의 방증 자료는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j Global] 이해경…고종의 손녀, 의친왕의 다섯째 딸 ‘왕가의 아련한 추억’ | 중앙일보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황태자 자리를 빼앗긴 친왕(親王)이었다. 그의 아내 친왕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녀를 낳은 건 아버지 눈에 들었던 첩. 생모와 세 살 때 떨어져 친왕비 손에 자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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