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이강을 독립지사로 각색하지만, 그의 불량했던 행실이 여기저기서 뻥뻥 터진다. 후손들은 일제의 음모라며 식민사관, 극우 운운하지만 오히려 일제만큼 그와 그 가족을 우대했던 이들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이 주는 돈으로 호의호색하고 이제와서는 항일지사 코스프레를 하는 건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망한 왕조의 후손이 나라의 재산 궁궐이 제집인양 무단 거주하다 쫓겨난 걸 꽤나 억울하게 생각한다. 궁은 국가의 재산이다. 일가의 재산이 아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소유도 끝나는 것이다. 조선 태조 개국 후 고려왕실이 어떤 대접을 받았던가. 수창궁이 원래 내 것인데 이런 말은 마음으로만 품어야 하는 것이다. 즉 대동단결선언에서도 언급했듯 "융희황제가 (싸우지 않고) 삼보를 포기했을 때" 모두 사라진 것이다. 더는 1910년 순종이 이왕이 된 것은 격하된 것이 아니라 대한의 지배자에서 일본 천황의 왕공족으로 편입된 것이다. 즉 일제가 백성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또 국가의 인수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준 것이다. 역대 어느 이왕二王(전 왕조의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 자신의 궁실을 유지했던가. 광복 이후 소위 황실가족의 "고생(?)"은 일제로부터 받았던 돈과 예우가 뚝 끊기자 그것 없이 자립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로 의친왕은 한반도 내 수작자 가운데 은사금 탑을 찍었다.(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보다 해방 후가 더 힘들었다 말하며, 일제보다 이승만을 더 싫어한다.)
의친왕의 여성편력은 유명하다. 독립운동을 위장하기 위해 기생을 불렀다고 주장하지만, 설령 독립운동 했다 치더라도 기생을 부르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듯하다. 아이를 낳은 여성만 10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밖에도 미국에서, 또 귀국해서 사랑을 나눴던 여성이 한둘이 아니다.
스무 명이 넘는 자식 가운데 첫 아이가 훗날 공위를 물려받은 이건李鍵(1909~1990)이다. 여러 가계에 이건의 생모는 수관당 정씨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이건 스스로도 누구인지 몰랐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 단서를 알려주는 책을 확인했다.
사카모토 다쓰노스케 (坂本辰之助)가 쓴 책 "황실 및 황족"의 의친왕 부분이다. 1909년 초판 발간 이후 10년에 2판을 찍었다. 일본의 강점 후 새로 판을 내 조선왕공족을 추가했다. 여기에는 이왕(순종), 이태왕(고종) 등 왕공, 비빈의 작을 받은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坂本辰之助 編, 皇室及皇族(2版)(東京: 昭文堂, 1910.10.), (朝鮮王公二族) pp.24~25
이강 공 전하는 이태왕 전하의 제2왕자, 궁녀 장씨의 소생이다. 이태왕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해 생모와 민간에 숨어 있다가 그 후 메이지26년(1893) 궁에 들어와 의화궁이라고 불렸다. 27년(1894) 청일전쟁 때 대사로 우리나라(일본)에 와서 평화 후에는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에 유학하고 39년(1906) 귀국해 의친왕이라 불렸다. 매년 3만원의 세비를 받고 지금까지 육군부장의 영예로운 직위를 누리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왕족의 생활을 하지 않아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며, 특히 오랫동안 일본에 계셔서 일본 생활에 익숙해지셨다. 경성에 계실 때에도 일본식 집에서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드시며 생활하셨다.
전하의 비(妃)는 나이 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 정도로 둥근 얼굴에 품위 있는 용모를 가지신 현명한 분으로 항상 덕수궁에 머무르며 태왕 전하를 모시고 계신다고 한다. 왕자에게는 측실인 일본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한 명 있다.
의친왕이 귀국 후 일본을 그리 좋아했는지 몰랐다. 이 글을 보니, 의친왕이 "일본지조선"에 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아래 링크 참조)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는 " 측실인 일본 여성에게 태어난 아들 한 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1910년에 출간되었다. 의친왕 자녀에 대한 첫 정보로 "아들 한 명"은 의친왕의 첫 아이임에 틀림없다. 이건은 의친왕의 맏아들이다. 1909년생으로 이 책의 출판시기와도 일치한다. 동 시기 출판물에서 천황가의 일원인 왕공족에 대해 함부로 언급할 수는 없었을 터,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정보라고 하겠다.
이건은 훗날 사카모토 겐이치로 개명하고 일본에 귀화했으니 이 추정이 맞다면 어머니의 나라를 택한 셈이다. 혹자는 전 의친왕 이강이 일본인을 배후자로 얻은 이건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가 일본인과 혼인하는 건 못 보는 사람이 일본 여성과 사랑을 나눠 아이 낳는 건 OK? 실제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최악의 성모랄 소유자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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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망명 기도 사건 한 건으로 의화군義和君,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 이강은 일약 황실의 독립운동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실제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는 국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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