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의친왕 이강, 일본 경찰에 실토하다-의친왕 상해 망명 사건의 진실

자불어 2025. 5. 15. 09:09
728x90

신보晨報는 신종보晨鐘報라는 이름으로 1916년 8월 15일 발간을 시작했다. 량치자오梁啓超, 린장민林長民 등이 주도하여 “젊은이가 죽지 않는 한 중국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치 아래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신문이다. 이 신문은 1919년 12월 8일자에서 의친왕 망명 사건의 전말을 다뤘다.

신문 기사의 말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강이 여전히 미심쩍어 하자 한 거한이 총으로 위협하여 결국 그날 밤 11시를 전후하여 이강 공과 마부 김복삼은 북한산으로 끌려갔다. 다음날인 10일 변장하고 수색역에서 기타에 올라탄 이강 공 일행은 11일 오전 11시 30분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기차에서 내린 이강 공은 압록강 다리를 건너 중국 경내로 진입하려다, 뒤쫓아 온 일본경찰에게 덜미가 잡히게 되었다.
갑작스런 일본경찰의 출현에 아연실색한 이강 공 일행의 모양을 수상하게 여긴 일본경찰은 심문을 위해 그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심한 추궁에 결국 이강 공이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모든 계획이 밝혀지고 말았다. 이강 공과 일행은 13일 일본경찰에 의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이미 13명이 체포되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조선혁명당의 향후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이강 공은 현재 총독부 내의 녹천정에 유폐되어 있으며, 그의 처소였던 의화궁은 군경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태이다. 일부 강경파들은 이강 공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한국의 왕자에게 가혹한 수단이 가해지면 한인들 사이에 구왕실을 향한 충성심이 다시 생겨날 것을 염려하여 주저하였다. 더구나 조선황족에 관한 대우규정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황실의 규정을 적용할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대부분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을 마무리 짓기를 원하였다.
『신보晨報』, 1919년 12월 9일.(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본 이용)

이 신문 보도의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의친왕이 안동에서 붙잡힌 것은 일본 경찰을 보고 아연실색한 의친왕 일행의 행동거지였다.
2. 일본 경찰은 의친왕의 실토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3. 조선총독부 당국의 강경파는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수가 구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다시 생길 것을 걱정해 처벌하지 않았다. 또한 별도 대우 규정이 없기도 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의친왕은 붙잡힌 뒤 일본 경찰에게 협조했다. 이는 현재 의친왕의 서명이 남아 있는 신문조서가 상당히 신빙성있는 자료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실패한 뒤 의친왕 이강은 전협 이하 대동단원들의 역할을 실토했고, 그들은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해당 사건에서 처벌 받지 않은 사람은 일본 황실 왕공족 전 의친왕 이강뿐이었다.(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의친왕 숭배자들은 의친왕이 그 뒤로도 몰래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나 의친왕은 해당 사건 뒤 대동단원 누구 하나 챙기지 않았다. 1920년대 의친왕의 독립운동은 증거도 없지만 논리적으로도 뒷받침할 수 없는 허황된 주장이다.  
 

신보, 이 신문은 1919년 6월 22일자로 위 내용은 12월 9일자에 실렸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