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엄비가 싫어한 두 사람, 의화궁과 이토 히로부미 본문
의친왕 이강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를 하나씩 소개한다. 아래는 메이지시대 일본 언론인 요코야마 겐노스케(横山源之助, 1871-1915)의 비망록 <범인비범인 凡人非凡人>의 기록이다. 엄비가 싫어했던 두 사람, 의친왕과 이토 히로부미다. 알고 보면 둘 사이의 관계는 매우 깊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영친왕뿐 아니라 의친왕도 부탁했다. 의친왕은 이토 히로부미 사후 통감부로 조문을 갔다. 여하튼 의화군(궁), 의친왕, 이강공의 기록을 차근히 모아보려 한다. 참고로 의화궁이라고 하지만 의화궁주, 또는 사동궁주라는 말은 없다. "궁주宮主"는 본디 여성의 봉호다.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그런 단어도 만들어 쓰곤 한다.
조선의 소요도 여하튼 일단락되었다. 신문지상의 보도로 멀찌감치 바라만 봐서인지 명료하지 않아 두셋 조선통의 이야기를 참작하여 작금의 조선을 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오사카성 또는 막부말기의 에도성 모양새라. 동정의 눈으로 보면 서글픈 일대 비극으로 태황제(고종)이나 엄비를 알고 혹 박영효, 또는 이도재 등도 특별한 사정 때문인지 짙은 먹구름이 경운궁을 휘감고 있다. 특히나 사극의 주인공인 전황제란 인물은 조선인의 정수(?-역자 추가)를 모은 듯 일본인에게도 중국인에게도 또한 러시아인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 사극의 한 광경을 보태고 있다. 가령 바깥에 몸을 두고 일본인이라는 입장을 잠시 잊고 이번 소요를 보면 사건 하나하나 희극의 빛을 띠는데 황제의 양위와 이총리(이완용)의 고간도, 박영효의 태도도, 또 시위대의 폭동도 모두 희극의 재료로 고금동서의 모든 망국사가 활동사진이 되어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보는 이의 관점에 맡기고 약간의 내가 본 바를 기록해 독자들과 함께 한국 쇠망의 활동사진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중략)
하늘에 두 태양이 있다. 조선에는 언제나 두 개의 세력이 병존한다. 정치상으로는 황제의 세력과 통감의 세력이 나란히 있어 도탄을 불러온 궁중에서는 바깥의 세력은 태황제가 쥐고 있으나 내부의 세력은 엄비가 장악했다. 그래서 엄비의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세력이 둘러싸고 있었다. 엄주익, 엄상익 두 악한이 가장 곁에 있고 원로 대신으로는 조병식, 민병한 등이 최측근이다. 이 외에 많은 참모가 엄비를 둘러싸고 있다. 엄비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영친왕이며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의화궁(의친왕 이강)과 이토 통감이다. (중략)
의화궁으로 말하면 이토 통감과 비슷한 시기에 도쿄와 교토를 왕래하던 일종의 특별한 처지에 있던 귀공자였는데, 보통 평범한 엄귀인도 이 의화궁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는 독부가 되었다. 이를 아는 잡배 무리들은 그를 호기회로 삼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쓰길 그치지 않았다. 뭐라해도 엄비는 이 의화궁을 위해 수십만의 금전을 소비했다고 한다.
독자는 의화궁이 미국에 유학하며 도중에 몇 차례 일본에 돌아온 일을 알 것이다. 이는 의화궁을 밑천으로 도박을 하려는 어중이떠중이의 술책으로 의화궁을 일본에 불러 엄비로부터 자금을 뜯어내려는 고육책이었다. 의화궁이 일본에 돌아오면 자신의 운명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터 귀태를 품은 엄비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정부인 현영운의 처(배정자) 등은 잘 알려진 (사람 중) 하나로 이토공을 아빠라 하여 엄비에게 뽑혀 들어가 의화궁을 소재로 수만의 금액을 뜯어낸 적도 있었다. 또 현영운뿐아니다. (하략)
Yokoyama, Gennosuke. Bonjin hibonjin [凡人非凡人]. Tokyo: Shinchosha, July 1911.

'이왕가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종, 하야시 곤스케에게 의화군 이강을 말하다 (0) | 2025.04.08 |
---|---|
‘경무대’란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0) | 2025.04.02 |
가짜 칙명으로 의병장 민긍호를 욕되게 하는, 의친왕 이강 (0) | 2025.03.29 |
전 의친왕 이강이 김규식을 찾아간 이야기 (1) | 2025.03.22 |
대한제국 태자태사 문충공 이토 히로부미 (0) | 2025.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