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우국지사 매천 황현, 의친왕 이강을 기록하다

자불어 2025. 5. 1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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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지사 황현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나라가 500년 간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 죽지 않는 선비가 없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독약을 마셨다. 광복 후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그는 1864년부터 1910년까지 편년체 역사서 매천야록을 남겼다. 매천야록은 지방 사림에 눈에 비친 조선, 대한제국 멸망사다. 물론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로 정보의 제한, 또는 사인의 감정이 섞였음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고종, 명성황후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최근 의친왕을 숭모하는 단체가 나타나 여러 독립지사 후손을 찾아다니며 의친왕의 업적을 허위 분식하고 있다. 그들의 나쁜 점 중 하나는 의친왕의 몹쓸 행동이나 일제에 협력했던 모습을 담은 기록은 모두 일제에 의해 오염된 것, 또는 "야설"로 치부하는 것이다. 결국 매천야록까지 야록에 불과하다며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라를 빼앗기고 의친왕 이강은 이완용보다 더 많은 은사금을 받았다. 그리고 함께 상해로 향했던 전협이 감옥에서 다리가 문드러져 있을 때 벳부 온천탕에 몸담갔다. 상해로의 망명 역시 일탈의 일부였다. 그는 돌아와 자신이 아니라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났다 말했다. 그리고 야설, 야록 운운하는 자에게 덧붙여 말한다. "야록"이라는 것은 초야, 산림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냥 풍문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의견이오 생각이다. 

그럼 매천야록에 실린 의친왕비 김씨 이야기를 살펴보자. 

김사준金思濬의 딸을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의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김사준은 의민공懿愍公 김제남金悌男의 후예이다. 처음에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국혼國婚으로 일어나는 화근을 막기 위해 친정으로 서신을 보내 대대로 왕실과 국혼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때 김사준이 국혼을 않겠다는 사유를 적어 올리자 민후閔后(명성황후)는 김씨의 용모와 부덕婦德을 사랑하여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국혼이 이루어져 김사준을 선산부사로 기용하자 많은 사람들은 세자의 뜻이 불만스러울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망상을 하면서 김사준의 집에 많은 손님이 찾아들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 후 이강은 동궁을 나와 사치와 뇌물을 좋아하여 그를 따르는 여마輿馬와 배종陪從들이 도로에 가득하고, 궁노宮奴 수십 명이 길거리를 막고 소란을 피우므로 민씨의 노복들은 그들을 피하였다.
그리고 의화군의 관문關文이 각도에 유행하여 소송인과 채무자에게 받아들인 돈은 장물을 추심하듯 많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탄식하기를, “친족과 원족을 막론하고 왕족은 모두 불량합니다. 어린 나이에 행동이 이러하니 앞일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씨는 현명하고 문자를 잘 알아 맹자孟子를 줄줄 외우고 배서褙書도 법도 있게 잘 썼다.

(매천야록 권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앞서 고종도 일반인 정도로만 자랐으면 좋겠다 한 바 있는데, 의친왕이야 말로 "싹수가 노랗다."는 말이 잘 어울린다. 근대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과 같은 반열에 올랐을 지 모른다. 

매천 황현(채용신 작 /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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