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사람들

이토 히로부미에게 신세 한탄한 의친왕 이강

자불어 2025. 5. 17.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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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의친왕 이강, 알려진 바와 달리 의친왕은 이토에게 매달렸고, 이토 사후 장례식에도 발빠르게 조문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제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경제 정책을 주관한다. 그리고 초대 통감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 부임한다. 통감은 대한제국 각부 대신을 소집해 시정 관련 회의를 개최했는데, 현재 회의록이 전한다. 1906년 7월 12일 오전 10시 반에 제8회 회의가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이등박문 외 찬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탁지부대신 민영기,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통역은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고쿠부 쇼타로) 등이었다. 이날 열린 회의 안건 가운데 하나가 의친왕 전하였다. 왜? 의병 지원이나 반일 사상 때문이었을까? 그럼 회의록을 보자.


이토 통감: 의친왕義親王이 말하는 바를 듣건대 영친왕英親王은 그 대우가 실로 정중하여 여러 가지 대우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런 처지에 있다고 내게 호소하였소. 그러나 이런 일은 당연히 귀국貴國의 내부사정에 속하는 일이므로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소. 나에게는 더욱더 적당치 못한 일이지만 이래서는 한국의 체면에도 관계 되는 일이므로 나로서는 일단 주의를 해두는 바이오. 생각건대 이리로 가서 이를 호소해도 도저히 그 실행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늙은이인 나에게 이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겠소? 듣는 바에 의하면 동궁同宮(의화궁=의친왕)이 일본 체재 중에 여러 곳에서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되어 마침내 우리나라 법정에 제소되기에 이를지도 모를 상태에 있다고 하오. 우리나라 법정은 결코 의친왕이라 하여 민법상의 의무에 관해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은 여러분도 숙지할 것이오. 지금 거주하시는 가옥과 같은 것도 이대로 정부에서 의화궁에게 대여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를 의친왕의 명의로 바꾼다면 즉시 채권자로부터 차압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오.

민(영기) 탁상度相(탁지부대신): 앞서 의친왕이 폐하(고종)를 알현하셨을 때 그 집은 정부 소유로,  그(의친왕)는 소위 집을 임대하고 있는 신분이므로 매우 거북한 신세라고 말한 적이 있소. 그때 나도 때마침 어전에 있었으므로 정부의 집이라고 해서 결코 정부에서 전하가 거주하시는 것을 끌어낼 일은 없으므로 안심하셔도 좋을 것이고, 이에 더하여 과거 사례(古例)에 의거하건대 친왕親王의 집은 호조戶曹에서 이를 지은 선례도 있다고 설명드린 적이 있소. 지난날에도 동저同邸에 비가 새는 곳이 있었는데 전하는 사람을 나에게 보내시어 정부의 집이므로 즉시 정부에서 이를 수선하라고 명령하셨소. 나는 지당한 말씀이라고 하며 곧 기수技手를 파견하여 수선을 시킨 일이 있소. 어쨌든 완전히 셋집에 주거하는 마음으로 계시는 것 같소.

이토 통감: 지난날에도 의화궁에게 500엔의 채권이 있는 일본인이 있어 이곳으로 와서 동궁同宮에게 상환을 청구했지만 빚을 갚지 않으므로 우리 이사청理事廳에 제소하여 이사청에서 이를 나에게 보고했소. 그 차용증서라는 것을 보건대 분명히 변제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의화궁義和宮 저택을 인도할 것이라는 조건이 기재되어 있었소.

각 대신: 그렇소?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의친왕은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대우도 못받고 빚까지 진 본인의 신세를 한탄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오죽하면 내게까지 찾아왔겠냐며 이는 한국 위신 문제이니 빚부터 처리하라며 압박하고, 자칫 의화궁을 의친왕에게 내주었다가는 차압당할 것이니, 반드시 정부 소유로 남길 것을 조언했다.(의화궁이건 사동궁이건 어차피 그의 손에 팔릴 운명이었던 듯) 권중현에 따르면 의친왕은 빚을 변제하고자 고종에게 의화궁을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 사정을 몰랐던 권중현은 빼앗을 일도 없고 정부에서 다 관리해 줄 것이어 걱정 말고 사시라고 했다. 그래서 이토의 이야기에도 일단 의친왕이 의화궁에 사는 건 불편이 없을 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토는 차용증서에 채무를 변제하지 못할 경우 의화궁을 인도하는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각 대신은 "그렇소?"라고 반문했다. 깜놀했단 말이다. 국권을 빼앗긴 것도 부끄러운데... 저 빚쟁이 황족은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신세 한탄하고, 게다가 통감부 회의에서 안건으로 나왔다니... 국격의 실추도 이루 말할 수 없다. 고종이며 엄비며 그리 돈을 보내주었건만... 의친왕의 후손들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야록"에 방점을 찍지만, 그 기준대로라면 얼마나 방종하게 살았기에 거기까지 소문이 나서 기록에 남았나 싶다.

통감부 회의록 표지(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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