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나라 다이안지大安寺 본문
다이안지는 쇼토쿠 태자가 아스카에 지은 구마고리쇼샤(熊凝精舎)에서 시작하여 헤이조쿄로 이전하며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라칠대사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찰의 규모는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에 버금갈 정도고 커서 “남대사(南大寺)”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017년에는 두 개의 목탑이 모두 불타버렸고, 에도시대 중건 시도가 있었지만 옛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 사찰의 바깥에는 칠층탑 기단터가 남아있어 지금보다는 훨씬 컸던 예전 사역을 짐작케 해준다.
사찰 내에는 나라시대의 유품으로 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9개의 목조불과 기와 등을 갖고 있다. 사찰이 쇠퇴했는데도 여전시 창건 시대의 신앙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그런데 목조불이나 기와보다 이곳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보물관 앞에 있는 석비였다.
앞면의 표제는 「전공기념비(戰功紀念碑)」로 시간내어 모두 읽을 수는 없었지만 “明治三十七年二月宣戰大詔(메이지 37년 2월 선전포고 조서를 반포하고)”, “我鄕數十人出征兵士(우리 마을에서 수십인이 병사로 출정하여)”, “宣布於滿韓兩野平和之福(만한 두 들판에 평화의 복을 선포하니)” 등등의 문구가 보여 러일전쟁 기념비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좌측면에는 “구마고리지로사에몬이 짓고 쓰다(熊凝治郞左衛門撰幷書)”라는 명문이 있었다. 구마고리는 다이안지의 기원이 되는 구마고리쇼사에서 온 것인 만큼 아마도 절의 주지였거나 사찰에서 그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석의 뒷면에는 「출정군인방명(出征軍人芳名)」 제하에 岩井有太郞 등 57명의 이름과 하단에 “いろは順”으로 기입했다고 새겼다. 전몰자들인듯 싶다.
일본에 가면 불편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조선반도(朝鮮半島)”라는 단어이다. “조선”이어서가 아니라, 병렬하는 단어들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일본의 동아시아 관련 텍스트를 보면 중국, 조선반도, 일본으로 병치한다. 중국과 일본은 국가체인 반면 조선반도는 지리적 개념이다. 동등한 개념이 되려면 중국대륙, 조선반도, 일본열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굳이 정치체로 표기하고 싶다면, 중국, 한국, 조선, 일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편의상이라고 하기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혐의를 둘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와 같은 표현이 제국시대 일본이 식민지 확장에 사용했던 레토릭이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은 조선이나 만주를 지리적 개념으로 형해화시킴으로써 독립적 정치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러일전쟁 시기에 “滿韓兩野(만주와 한국, 두 들판)”라는 단어가 당시로서는 시골이었을 이 곳의 비석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며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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