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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고전

낙랑: 오다 쇼고의 조선사대계

자불어 2022. 8. 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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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낙랑, 대방 2군의 유적

근년 조선총독부에서 진행 중인 고적조사사업은 조선고대사의 연구에 자못 유익한 결과를 주어 낙랑, 대방 2군의 유적에 대해서도 소득이 적지 않다. 따라서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간단히 독자에게 소개한다. 1. 낙랑군 치소 및 동군 조선현의 유적
오늘날 평양 시가에서 속칭 기씨 정전이라는 지역에서 대동강을 건너편 대안, 즉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토성리에 약 4, 5정町의 토성 유적이 남아있고 그곳에서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토성 유적의 서남동 세 방향은 각기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낙랑 시대의 분묘 천백수십기가 현존한다. 이 분묘 내벽에는 두꺼운 전돌(대형 연와)로 축조하고 그 전돌에는 기하학적 문양을 새겼다. 내부에서는 수습한 다수의 발굴품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한대 이후 등장한 지나인의 고분이다. 대정 大正2년(1913) 9월 23일 총독부 고적조사위원 공학박사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 등 일행은 이곳을 조사하고 이 토성을 낙랑군 치소를 두었던 조선현치의 유적이며 동시에 낙랑군치 유적으로 단정했다. 그는 이것을 유적 유물의 실제와 이 토성 터의 위치가 후위後魏 역도원酈道元이 저술한 수경주水經注의 당시 고구려왕(문자명왕)이 보낸 사자의 이야기 중 "우리 번사(고구려왕의 사자)가 찾아와 말했다. 성(고구려의 도성 평양성)은 패수(대동강)의 양지(북안)에 있다. 그 상은 서쪽으로 흐른다. 따라서 낙랑 조선현朝鮮縣을 지난다. 즉 낙랑군치樂浪郡治다. 한漢 무제武帝가 설치했다. 그리고 서북으로 흐른다."는 기록과 부합한다. 그러나 이 토성 유적이 한 무제가 처음으로 낙랑군을 설치했던 때부터 군치가 있었던 곳인지, 또는 진초에 와서 낙랑군이 고구려의 압박을 받은 뒤에 옮긴 군치 유적인지 아직 연구를 요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토성이 낙랑군치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곳 또는 이 부근에서 (1)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고 조각한 와당, (2) '낙랑태수樂浪太守' 문자를 새긴 봉니封泥(점토에 인장을 날인해 문서를 봉인하는 데 사용한 것), (3) 낙랑군 속현 가운데 하나인 눌한군장訥邯君長의 봉니, (4) 전한시대의 물건으로 보이는 동촉 銅鏃, 동인銅印, 오수전五銖錢 등, (5)'대진원강大晉元康'(원강은 진의 연호), '천추만세千秋萬歲' 등의 문자가 있는 와당 등이 발견되어 밝혀졌다.(대정8년 3월 출판 조선총독부고적조사특별보고 제1책) 오다쇼고小田省吾, 조선사대계 朝鮮史大系 상세사上世史,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 경성京城, 1927), p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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