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중국 이야기 (38)
일상 역사
'물시계'라고 하면 세종 때 만든 조선시대의 자격루를 떠올릴 것이다. 물을 흘러내려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인 물시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낮에는 해로 시간을 측정하면 되지만 해마저 잠든 밤에는 시간을 측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간의簡儀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같은 일종의 별시계도 있었지만 잠 안 자고 내내 별을 관측하며 시간을 측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밤의 시간은 대체로 물시계에 의존했다. 초기의 물시계는 통 밑에 구멍을 낸 것이었다. 물시계에 샐 '루漏' 자를 쓰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중국에는 한대漢代 간단한 물시계인 누기漏器가 실물로 남아 있다.(원통형 금속 용기 아래 물이 빠지는 구멍이 있다.) 자격루처럼 여러 통을 두고 마지막 통에 부표를 넣어 떠오르게 하는 방식의 물시계는..
신라와 당은 오랜 시간 사절을 주고받았다. 당시 바다를 건너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바다를 건너오다 사고를 당한 사신 이야기도 나온다. 당나라 사신 가운데 처음 이름을 올린 사람이 주자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48년(626) 가을 7월에 당唐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당 고조高祖가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고구려와 서로 화친할 것을 권유하는 조서를 내렸다." 당나라 사신들의 이름은 종종 언급되나 구당서나 신당서 열전에 입전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주자사는 유학전儒學傳에 실려있다. 이는 그만큼 동시대 그의 학문이나 글솜씨가 인정받았던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의 열전을 옮겨 본다. (*밑줄은 번역에 자신 없는 부분이니, 언제든지 댓..
2004년 8월 13일 하북성河北省 승덕시承德市 중급인민법원은 피고 이해도李海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해도는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승덕시 문물국 외팔묘外八廟 관리처 문보부 부주임, 피서산장박물관避暑山莊博物館 부관장 등 역임하며 건륭분채묘금무량수좌상 乾隆粉彩描金無量壽坐像, 紫金嵌松石無量壽佛 등 소장품 259건을 빼돌리고 그중 152건을 팔아치워 72,000 달러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그는 진품 대신 짝퉁을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오랫동안 범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2심 재판부 역시 형을 확정, 2010년 11월 19일 형이 집행되었다. 문화재 절도가 사람의 인명을 빼앗아야 할 정도로 중범죄일까? 다른 나라라면 모르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렇다. 인민의 공분을 쌓는 반국가적 행위, 중국은 이런 행동을..
강소 구용현 발견 동오 주전 유물 江蘇句容縣發現東吳鑄錢遺物 1975년 10월 진강박물관鎭江博物館은 구용현句容縣 갈촌공사葛村公社에서 동오가 주조한 대천오백大泉五百, 대천당천大泉當千 및 거푸집을 발견했다. 거푸집은 길이가 약 15cm로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형상이다. 대천당천은 직경이 3.4cm, 무게 6.5g, 대천오백은 두 종류로 하나는 직경 3.15cm, 다른 하나는 3cm으로 무게는 6~6.3g이다. 이 동전은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토제 용범에 쇳물이 주입하여 주조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4매 1조의 거푸집이 총 20여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번에 100여 매의 동전을 제작한다. 동전은 표면은 거칠고 몇 개씩 엉겨있으며 외곽에는 갈아내야 할 청동 조각이 붙어있다. 용범 안에..
“승상제갈령丞相諸葛令” 비석은 1980년 여름 소장 탁본 가운데 발견한 것이다. 상당히 드문 삼국시대 비석의 탁본이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丞相諸葛令. 按九里堤捍護都城, 用防水患. 今修築竣. 告爾居民, 勿許侵佔, 損壞. 有犯, 治以嚴法. 令即遵行. 章武三年九月十五日. (승상 제갈의 령. 구리제방은 도성을 보호하고 수해를 방지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너희 백성에게 고하니 침범하여 점유하거나 파손하는 행위를 것을 절대 허락치 아니한다. 만일 범하는 자가 있다면 엄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명령을 바로 따르라. 장무3년(223) 9월 15일. 비의 높이는 53cm, 너비는 38cm이다. 는 “구리제九里堤는 현의 서쪽에 있고 제방의 길이가 9리다. 노인들에게 전해오길 제갈량이 물살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고 ..
안휘 남릉현 발견 오왕 광 검 安徽南陵縣發現吳王光劍 1978년 남릉현문화관南陵縣文化館은 삼리공사三里公社에서 청동 단검을 구매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검은 삼리공사와 하만공사何灣公社 경계의 작은 산 위 지표로부터 약 1m 아래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출토되었을 때 검은 이미 기계에 의해 조각난 상태였다. 검의 길이는 약 50cm으로 손잡이는 원통형이다. 칼 몸통에 음각 전서 명문이 있다. “攻敔王光自乍(作)用劍以戰戍人(공오왕광자자(작)용검이전수인)” 좌전 소공27년에 “광은 오왕 제번의 아들이다. 광은 거짓으로 병에 걸렸다며 굴실로 들어갔다. 물고기를 올리는 데, 물고기 뱃속에 칼을 숨겨 두었다가 칼을 뽑아 왕을 찔렀고 가슴을 꿰뚫어 결국 왕을 시해했다. 합려闔廬가 그 아들을 경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하북 정정현 출토 전연 원새4년 각자묘전 河北正定縣出土前燕元璽四年刻字墓塼 정기중程紀中 1977년 5월 하북성河北省 정정현正定县 대풍둔촌大豐屯村 사원 범운증范雲增이 정정문관소正定文管所로 각자묘전과 두건의 홍도 항아리를 보냈다. 그에 따르면 이 마을의 고묘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한다. 묘실은 이미 파괴되고 남은 것은 이 세 건 밖에 없었다고 한다. 각자전은 청회색으로 길이 32, 너비 16.5, 두께 7.5~8cm다. 양 끝이 부서졌지만 명문이 잘 남아 있다. 명문은 총 54자로, “元璽四年庚戌朔十四日乙未, 奉車都關内侯馬遠越造陶作塼五萬枚, 用功三萬二千, 土室遺監作中將慕容乾清酒七百斛, 牛犊二百頭.”다. 원새는 전연 모용준의 연호로 원새4년은 355년이다. 전연은 337년 모용황慕容皝이 연왕을 칭한 이후 370년..
무위 금사공사 출토 전진 건원12년 묘표 武威 金沙公社出土前秦建元十二年墓表 무위지구문화관武威地區文化館 종장발 鍾長發, 영독학寧篤學 1975년 3월 무위현 성 서북 7.5km 금사공사金沙公社 조가마趙家磨 대대大隊 사원이 정지작업을 하던 중 석제 묘표 1점이 발견되었다. 묘표는 평평하고 위는 원형 아래는 방형으로 높이 37cm, 너비 26.5cm, 두께 5cm이다. 묘표 아래의 장방형 복련좌는 연화문을 저부조로 새겼으며 연꽃잎은 끝이 뾰족하고 이중으로 되어 있다. 위진~십육국시대 연판문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연화좌대는 높이가 9cm, 길이가 40cm, 너비가 18.2cm다. 묘표 상부에는 전서로 “墓表(묘표)” 두 자를 새겼고 아래는 위체자魏體字로 9행 매행 8자의 명문이 있다. “전진건원십이년”은 376..
아침에 멀뚱멀뚱 일어나 연말 마감해야 할 것을 둘러보다 우연히 남송 요관姚寬의 서계총어西溪叢語를 읽게 되었다. 찾던 내용과 상관없이 개원통보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개원통보하면 다들 헷갈려하는 것이, 1. 개원통보는 당대의 동전으로 당 현종 개원연간의 물건이 아니라 당 고조 무덕4년(621)에 처음 주조한 것이다. 이 내용은 당서 식화지에 나오기 때문에 빼박캔트,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많이들 틀린다. 2. "개통원보"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당육전에서는 개통원보라고 했다며... 그러나 아래 요관이 명쾌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당나라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궁금한 이 하나 없었으랴. 개원통보이니 개통원보로 잘못 읽고 우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 궁금..
아래 글은 진방직陳邦直의 나진옥羅振玉傳(新京: 滿日文化協會: 康德10(1943))을 번역한 것이다. 동년시대童年時代상우 나씨의 가계 上虞羅氏家世 나진옥羅振玉 선생의 원적은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이다. 증조 돈현공敦賢公(자 희재希齋)은 가경년간(1796~1820) 염하鹽河의 막부에서 관직 생활을 하며 강회江淮를 오가다가 결국에 강소성 회안부淮安府에 터를 잡았다. 돈현공은 아들이 9명 있었는데, 셋째는 이름이 학상鶴翔(자 익운翼雲)으로 그가 선생의 조부다. 강소성 고우주高郵州 지주知州를 역임했다. 학상공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장자가 수훈樹勳(자 요흠堯欽)으로 그가 선생의 부친이다. 강녕江寗 청하현승淸河縣丞을 역임했다. 100여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강남의 문인 집안(書香世族)이다. 고향 회안 故鄕淮安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