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중국 이야기 (38)
일상 역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실에는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무덤에 부장했던 도용(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도용 가운데 요즘 미의 기준에 가장 충실한 얼굴형을 가진 것이 북위(北魏)의 것이다. 북위 도용은 모두 세 개로 하나는 갑옷을 입은 무사고, 다른 두 개는 문관이다. 문관은 각기 붉은색 도포와 백색 도포를 입었는데 유심히 살펴보면 서로 옷깃의 방향이 다르다. ‘서경(書經)’에 ‘좌임(左衽)한 사방의 오랑캐’라는 표현이 나온 이후 옷섶의 방향은 중국과 이민족을 나누는 지표가 되었다. 공자도 춘추시대의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환공(桓公)을 도와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친 일을 두고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좌임을 했을 것’이라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옛 중국인에게 옷을 여미는 방식은 자신과 이민족을 구분하는 잣..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허수아비 황제로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전권을 행사했다. 이러다보니 당 종실 이씨들은 반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들에게 잠재된 불안은 688년 명당 건립과 함께 폭발한다. 노왕魯王 영기靈夔(당 고조 이연의 19번째 아들)의 아들 범양왕范陽王 애藹가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짐이 유폐되었으니 제왕들은 나를 도우라"라는 명령을 종실 일족의 여러 왕들에게 보냈다. 대부분은 잠수탔지만 태종의 손자 낭야왕琅邪王 충沖이 박주博州에서 거병했고 이어 충의 부친이자 태종의 다섯번째 아들인 월왕越王 정貞이 호응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보낸 진압군에 한달도 못버티고 맥없이 무너지며 결국 둘 모두 동도 낙양의 궁전에 목이 걸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측천무후는..
사숙방(謝叔方)은 옹주(雍州) 만년인(萬年人)이다. 처음에 소랄왕(巢剌王) 이원길(李元吉)을 따라 토벌에 참전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원길이 굴질직부좌군기(屈咥直府左軍騎)에 임명했다. 태종(太宗)이 은태자(隱太子: 이건성)와 원길을 현무문(玄武門)에서 처단하자 숙방(叔方)이 부병(府兵)을 이끌고 풍립(馮立)과 함께 북궐(北闕) 아래서 맞서 싸워 경군홍(敬君弘)과 여세형(呂世衡)을 죽였다. 태종의 군대가 주춤하자 진부호군위(秦府護軍尉) 지경덕(遲敬德: 울지경덕)이 원길의 머리를 가져와 보여주자 숙방(叔方)이 말에서 내려 곡하고 달아났다. 이튿날 나와서 자수하자 태종은 ‘의사(義士)로다!’라며 풀어주라 명했다. 서·이 이주자사(西·伊二州刺史)로 일하며 변진(邊鎭)을 잘 다스려 호융(胡戎)이 사랑하고 공경하..
요 며칠 전 미공군 특수작전비행단 C-146A 울프하운드가 타이베이 송산공항에 착륙했다. 송산공항 우리로 따지면 김포공항이다. (인천공항은 도원공항-중정공항) 울프하운드는 특수작전 지원(인력 및 화물 수송)을 수행한다. 민주당이 당선되면 좋을 듯했던 중국 입장에서 요즘 미국의 행동을 보면 당혹스러울 듯 하다. 미 군용기 대만 착륙 사건에 대해 CCTV(중국중앙전시대, 국영방송국)는 바로 논평을 냈다. 중국을 보면 더러 정부가 차마 못하지만, 진정 하고픈 이야기를 관영언론을 통해 발표하곤 한다. 이번 발표에도 "중국 인민의 피와 살점으로 만든 만리장성에 머리 박살, 피가 철철"이란 시진핑의 발언이 다시 나왔다. 중국 정부(방송국 포함) 논평을 보면, 전근대 조서를 읽는 느낌이 든다. 옛날 토벌 조서를 보면..
꼭두각시 인형을 읊다 傀儡吟 刻木牽絲作老翁, 鷄皮鶴髮與眞同. 須臾弄罷寂無事, 還似人生一夢中. 나무를 깎고 실을 당겨 늙은이를 만드니 닭살이며 백발이 진짜 같구나. 한 바탕 놀이가 끝나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해지니 그야말로 꿈같은 인생이로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읊은 시다. 현종 ‘개원(開元)의 성세’는 당의 절정기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천보(天寶) 14재(755) 안록산의 난의 발발하고 낙양과 장안의 방어에 실패하면서 자신은 애첩 양귀비와 제위를 잃고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음악과 가무, 예술과 예능을 두루 즐겼던 현종이기에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안사의 난 이전에 지었다면 징험일 것이오, 그 이후에 지었다면 절창이 아닐까 싶다.
이주는 오늘날의 하미이다. 태종 때 이오의 호인이 귀부하자 서이주를 설치했다.(630) 처음에는 기미주로 운영하다가 이주로 이름을 바꾸고 직할 주로 편재했다. 돈황 발견 천계원년 사주이주지지(沙州伊州地志)에 “보응연간(762~763) 토번에 함락되었다. 대중4년(860) 장의조가 수복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보응 원년 하서 제주는 여전히 건재했다. 아래 기록은 이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원광정은 하서 수장이다. 천보말년 이주자사가 되었다. 안록산의 난으로 서북변경의 수비병이 반란 진압에 투입되면서 하서, 농우의 군읍이 모두 토번에 함락되었다. 오직 광정 만이 수년간 이주를 지켰다. 외부로부터 구원이 당도하지 않자 오랑캐는 여러 가지를 내밀며 꾀어냈지만 그는 끝내 굽히지 않았고 부하들도 뜻을 같이 ..
모난 돌이 정 맞듯이 사람들에게 스케치북처럼 보이는 돌도 있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는 누가 봐도 스케치북이나 광고판처럼 보인다. 저 멀리 서역에도 그런 바위가 있었나 보다. 사람들이 오래 산 터전은 다 이유가 있듯, 새기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환채구비가 있는 길은 사막 오아시스와 초원지대를 연결하는 통로로, 사막 오아시스는 여기를 통해 목재를 수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640년 고창국 원정 직전 당의 장수 강행본(姜行本)도 이 길로 나무를 가져와 투석기를 만들었다. 이하 설명은 마옹(馬雍)의 글을 옮긴다. 사진은 바이두에서 다운 받은 것인데, 글자는 못읽더라도 한번 가보고 싶다. 동한 영화5년(140) 환채구비(煥彩溝碑), 옛 사남후비(沙南侯碑) 환채구(또는 환차이거우)는 하미(哈密)에서 바리쿤(巴里坤..
오호십육국 가운데 후조(後趙)라는 나라가 있다. 흉노의 일파라고 하는 갈족(羯族) 출신 석륵(石勒)이 세운 나라로, 서진(西晉)을 멸망시킨 유총(劉聰)-유요(劉曜)의 전조(前趙)를 멸하고 일시 화북을 석권하였던 나라다. 건국 군주 석륵은 비록 이민족 출신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나름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군주였다. 비록 그의 집권기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한족 문인들이 중국의 고전을 읽어주는 것을 즐겼다. 그가 죽은 후, 아들 석홍(石弘)이 즉위하였지만 모든 실권은 종제(친동생일지도 모르지만) 석호(石虎)의 손에 있었다. 이 석호라는 인간은 너무도 전쟁터를 전전한 탓인지 인간도륙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삼촌이 버젓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아버지가 황제라는 이유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