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중국 이야기 (38)
일상 역사
이하 "신강통신초"는 20세기 초 일본 니시혼간지의 문주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중앙아시아로 보낸 탐험대, 즉 오타니탐험대의 대원으로 2~3차 탐험을 주관, 참여했던 학승 다치바나 즈이초의 기록이다. 이하 1~2주 단위로 한 단락씩 연재해 보고자 한다. 신강통신초新疆通信抄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 1890~1968) 나는 제1회 몽골, 중앙아시아에서 과거 불교 융성 시대의 상황을 탐구하고 아울러 현재 남아있는 종교와 인심 등의 관계를 조사하라는 종단의 명을 받고 메이지41년 4월 고베 부두를 떠났다. 즉 제1회 탐험 여행은 내 나이 18세 봄에 시작되어 1년 반이 걸려 작년 카라코룸 산맥을 넘어 갠지스강 상류의 맑은 물을 말에게 먹이고 카슈미르의 아름다운(明媚)의 땅에서 플라타..
밀수입도, 밀수출도 많은 나라, 중국. 지난 3월 밀수 사건 검거 과정에서 젊은 경관이 희생되었다. 마치 영화 범죄도시의 한 장면 같다. 중국 어선들도 서해에서 그리 깽판을 치는데, 밀수업자들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듯. 2023년 3월 23일 밤, 왕샤오룽汪晓龙과 다른 동료 3명은 밀수범을 검거하는 임무를 띠고 해당 해역으로 이동했다. 다음날 새벽 3시 밀수품을 운반하던 용의자들이 현장에서 도주를 준비하자 즉시 작전을 개시했다. 경찰관 4명이 선박을 통제하려고 달려들었으나 용의자들은 도주를 시도하며 배에 시동을 걸었다. 배가 움직이자 용의자들과 다투고 있던 왕샤오룽과 린칭핑林清平이 바다에 빠졌다. 린칭핑은 왼쪽 종아리가 절단되는 부상을 입었고 왕샤오룽은 밀수선의 프로펠러에 맞아 사망했다. 왕햐오..
담기양譚其驤(1911~1992)은 중국역사지도집의 편찬자로 오늘날 중국이 생각하는 자국사의 영역을 정의하는 데 기여한 학자다. 즉, "역대 중국이 점령(심지어 영향력을 행사)했던 땅은 모두 중국땅"이라는 뻘소리의 이론적 기초를 만든 학자다. 그는 다른 나라의 지배는 강점이고 중국의 지배는 덕치인 까닭이라는 전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다. 근대 중국에서 내내 "반봉건"을 외쳤고 공산당 역시 낡은 체제를 뿌리 뽑자고 했지만 실은 그들은 그 낡은 체제의 충실한 제자이자 적자였다. 담기양은 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래는 그가 중국역사지도집을 편찬하고 발표한 원고로 그의 생각이자 오늘날 중국의 역사(영토)인식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가운데가 고힐강顧詰剛, 왼쪽이 담기양譚其驤, 오른쪽이 후인지侯仁之 역사상 중..
[속보영상] 중국 고층 빌딩서 큰 불..검은 연기에 화염까지 (daum.net) [속보영상] 중국 고층 빌딩서 큰 불..검은 연기에 화염까지 16일 오후 4시 30분쯤 중국 후난성 창사시 수십층 규모의 중국전신(電信)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중국중앙(CC)TV가 보도했습니다. CCTV가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불길이 빌딩 전체를 감싸며 고 v.daum.net 중국 남부 후난 성 최대의 도시인 창사의 중국전신빌딩(中国电信大厦)에 화재가 발생했다. 해당 건물은 2000년에 완공했으며 높이 218m로 지상 42층, 지하 2층이다. 15시 30분 전후 화재가 발생하여 인근 17개 소방서 36대의 소방차, 280명의 소방대원을 투입했고 현재 진화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인명 피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번에 화재..
아사나사이는 동돌궐 출신으로 이민족 때려잡는 이민족 장수로 열혈 활약했다. 당에 항복한 이후, 중앙아시아의 고창, 구자, 언기, 그리고 동아시아의 고구려까지, 그리고 그 결과 태종의 무덤에 배장되기도 하였다. 그는 태종이 죽었을 때 따라죽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흔히 중앙아시아의 코미타투스(Comitatus: 게르만 종사, 주군과 함께 살며, 전리품을 나누고, 죽을 때도 따라죽는 충성 끝판왕 집단 /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나옴.)의 일례로 곧잘 언급된다. 또한 고구려 원정에서 싸우던 중 화살을 맞았으나 화살을 뽑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는 전래 설화에 안시성 공격하다 당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생기게 된 된 여러 실마리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신당서에는 여러 이민족 장수들의 일..
전조前趙의 대산臺産 (전조前趙의 황제, 흉노족) 유요劉曜 때 재난과 이변이 너무 심해 공경에게 명하여 각기 박식하고 직언하는 인사 1인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대사공大司空 유균劉均이 대산을 천거했다. 유요가 친히 동당東堂에 나가 중황문中黃門을 보내 대책을 묻게 했다. 대산이 그 연유를 두루 설명하자 유요가 살펴보더니 찬탄하여 친히 불러 대면하고 정사에 참여시켰다. 대산이 흐느껴 울며 재변의 화를 진술하고 정치와 교화의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니 그 언사가 심히 간절했다. 이에 유요가 표정을 바꾸고 예를 차리더니 그를 박사좨주博士祭酒・간의대부諫議大夫・영태사령領太史令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그 말의 징험이 드러나자 요는 그를 더욱 중용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되었다. 한해에 세 번 승진하여 상서尙書・광..
나사원 羅思遠 출전: 개천전신기開天傳信記(태평광기太平廣記 77-03) 태평광기太平廣記 권77에 수록되어 있다. 태평광기는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칙명에 따라 태평흥국太平興國3년(978)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필기류筆記類 총서叢書로 5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漢나라에서 송초宋初까지의 야사, 전기, 소설에서 기사를 수집하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였다. 신선에서 잡록까지 92종류로 구분하고, 다시 150여 세목으로 나누었다. 아울러 각각의 문미에는 출전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오늘날 전하지 않는 문헌도 많이 있다. 대부분 사실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는 사회의 풍속과 관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본 내용의 원출전인 개천전신기開天傳信記의 원본은 현..
제융(祭肜)은 후한 전기 요동태수를 역임하며 흉노, 선비, 오환 등 이민족 관리에 공적을 세웠다. 초기 고구려 역사에도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하는 후한서(後漢書) 열전 제융(祭肜)에 실린 글이다. 제준(祭遵)에게는 종제 제융(祭肜)이 있다. / 융의 자는 차손(次孫)으로 일찍 홀로 되었는데, 효도를 다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천하에 난이 일어나 들에 밥짓는 연기가 사라졌는데도(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도) 홀로 무덤 곁을 지켰다. 매번 적들이 지나가면 한창 어린 것이 뜻이 곧다며 모두 기특하게 여기며 슬퍼하였다. 광무제(光武帝) 즉위 초에 제준의 추천으로 융을 황문시랑(黃門侍郎)에 배수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 제준이 후사가 없이 죽자 황제가 애도를 표하며 융을 언사장(偃師長)으로 삼아 준의 무덤 곁..
이하는 헝가리계 영국인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의 투루판 아스타나 고대무덤 발굴 기록으로 그의 저서 Innermost Asia(Oxford, 1928)에 수록되어 있다. 608년, 624년 기년이 있는 벽돌 묘지 무덤 i. 4로 연결되는 트렌치를 정리하며 우리는 입구로부터 26피트 떨어진 지점, 거의 지표면과 일치하는 높이에서 명문이 있는 전돌 3건이 남쪽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출로 군데 군데 희미해진 문자는 검은 바탕에 붉은으로 썼다. 이 명문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어려웠던 까닭에 인화해도 만족할 만한 사진을 얻지 못했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어쨌든 Li Ssû-yeh와 L. Giles 박사는 606년과 646년에 해당하는 기년을 확인해..
무덤 Ast.i.1의 정리 Ast.i.1로 가는 트렌치를 정리하며 다수의 작은 비단 조각들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능직으로 만든 훌륭한 무늬의 비단 조각[Ast.i.1.08, 011(Pl.78, 83)]과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한문 문서 잔편이 있었다. 이것들은 아마도 관재를 꺼낼 때 딸려 온 것으로 보인다. 입구 주변 실내는 2~3피트 정도 잔모래로 덮여 있었는데, 이것은 파괴된 벽을 막기 전까지 그 사이로 모래바람이 들어와 쌓일 정도로 한동안 무덤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쪽 벽 근처에서 소박한 매트 위에 누워있는,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두 구의 시신으로도 설명된다. 둘 모두 모리가 떨어져 났갔는데, 관에서 시신이 내팽겨쳐지면서 그리 되었음에 분명하다. 다만 수의 조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