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 40

고종, 하야시 곤스케에게 의화군 이강을 말하다

1905년 2월, 대한제국 대황제 폐하 고종이 자식 문제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를 불렀다. 곧 의화군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시점이었다. 이날의 대화내용은 하야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비밀 전보에 남아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서비스 중이다. #고종이 #의친왕을 신뢰했고 #제국익문사를 맡겼다는 이들이 있지만 의친왕이 고종을 만난 것 몇 번 안되고 주연집 같은 고종의 문집에는 흔적조차 없다. 오죽하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을까. (이것도 "나조차 속았다"할 것인가?) 그럼 자식 이강을 보는 고종의 심정을 들여다보자. 이에 앞서 미리 말해두지만, 의친왕 숭모꾼들은 이 역시 일제에 의해 오염된 사료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본국에 보내는 전문"이며 ..

이왕가 사람들 2025.04.08

‘경무대’란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모씨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승만 정권은 칠궁 내 전각을 헐고 경복궁의 '경'자와 신무문의 '무'자를 결합하여 '경무대'를 설치해 자신의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습니다." 틀린 말이다. 경무대景武臺는 경복궁의 후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썼던 말이다. 다음은 그 증거다. 1. 은대조례銀臺條例: 이 책은 승정원의 업무편람 같은 서적으로 흥선대원군의 명에 의해 작성한 것이다."황단皇壇" 조에 "명나라 세 황제의 기신일에 북원北苑에서 망배례를 거행할 때에는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예를 행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북원'의 각주에 "경무대景武臺다."라고 했다. 2. 각사등록各司謄錄: 대한제국기까지 중앙-지방을 오간 공문 모음집이다. 강원감영관첩江原監營關牒 고종6년(1869) 11월 15일에, ..

이왕가 사람들 2025.04.02

전 의친왕 이강이 김규식을 찾아간 이야기

의친왕을 숭모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독립지사들이 의친왕에게 찾아와 인사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김구 등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마자 바로 의친왕을 예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포럼 자료집(2024.6.)에서 이를 활자화했다. 그러나 임정인사들은 그날 숙소에서 기다리던 이승만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신문에 기록된 바, 귀국 당일 예방 설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전이라면 그 무리에 거짓말쟁이가 있는 거다.)여기에 더해 해방 정국 김규식의 비서로 일했던 송남헌의 관련 기록이 있어 추가한다. 한 단어도 빼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언젠가는 이강 공이 삼청장으로 김 박사를 방문했다. 이때 보료 위에 앉아 있..

이왕가 사람들 2025.03.22

의친왕의 축첩

의친왕은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도 여성과의 염문설에 그 때문에 미국인 청년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후궁과 첩을 구분하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부인 1인, 후궁 7인, 첩 8인이라고...(기준을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세요.) 군주제 시대에는 달리 봐야 한다"라고. 하지만 "근대"다. 근대에는 그것을 "축첩(쌓을 축, 첩 첩)"이라고 부른다. 의친왕은 일제강점기 막판까지 후궁인지 첩인지 늘려나갔다. (일관성은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과, 여기에 더해 기생까지 - 어떤 자료에는 일본인 첩도 있었다고.) 어떤 이는 의친왕이 축첩을 15세기 세종에 비교하며 왕실의 여성편력은 다르다고 강변한다. 어불성설이다. 세종의 시대를 우리는 중세, 또는 근세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친왕이 살던 시대는 20세..

이왕가 사람들 2025.02.27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3.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의친왕이 독립선언을?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요?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의친왕이 서명(?)했다는 "제2독립선언서"의 진실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대동단 독립선언서 사진을 게재하고 아래 설명을 부기했다.“대동단 독립선언서. 일제 치하에서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에서 평민이 되고자 했던 의친왕은 독립선언서 33인 중 제일 첫 번째로 ‘의친왕’이 아닌 ‘이강’으로 서명을 한다. 전협, 김가진 등 당대..

이왕가 사람들 2024.12.22

의친왕, 뉴욕에서 "흥청망청"

어떤 이들은 의화군, 훗날 의친왕 이강이 미국에서 유학생과 한국 독립의 뜻을 함께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강의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음 기사 역시 이강의 미국 생활을 잘 보여준다. 아래는 버지니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간지 Richmond Dispatch, January 22, 1902.에 실린 글이다. (정병준 선생님 논문의 각주를 보고 원문을 확인, 번역해 싣는다.) 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는 분은 필독하시기 바란다. 1902년이 대한제국에게 어떤 기간이었는지 생각하면 더 기가 막힌다. 왕자, "흥청망청"뉴욕 관광에 3만불을, 은행에 고소당한 한국 국왕의 둘째 아들 (뉴욕 월드의 워싱턴 특파원) 한국 국왕의 차남인 의화(Euiwha) 왕자는 누구 못지않게 “아름..

이왕가 사람들 2024.12.15

의친왕의 육남, 이곤의 학력

나무위키는 의친왕 육남 "이곤(李錕, 1919~1984)" 항목에 그가 "릿쇼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래서 영어와 독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의친왕기념사업회 홈페이지도 "릿쇼대학 영문과 졸업"이라고 했다. 그러나 1950년대 평화신문은 그가 졸업한 학교가 릿쇼"대학"이 아니라 릿쇼"중학"이라고 언급했다. 이곤(일명 이명길)씨는 4253년(1920) 11월 4일 이강 공의 육남으로서 모친 김씨(이강공의 삼첩三妾)의 몸에서 출생한 후 8세 때에 일본에 도항하여 동경 입회소학교立會小學校를 졸업하고 동경 사립 입정중학교立正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에서 중퇴하였다고 한다. 4271년(1938) 8월에 귀국하여 시내 종로구 견지동 85 사동궁에 거주 시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면 금곡리 XXX..

이왕가 사람들 2024.12.02

적십자사 총재 의친왕, 이토 히로부미를 도와 의료시설을 합병하다.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2.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적십자사 사장" 의친왕 편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은 고종황제로부터 칙명을 받고 대한적십자사 재에 취임하여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서양식 의료체제를 한국에 적극 도입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역시 해외에서 비밀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요한 단체가 된다.”(이준,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 사동궁과 의친왕의 항일운동,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이왕가 사람들 2024.11.21

대한제국 육군부장 의친왕, 군대 해산되던 날 피서 가다.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1. 삼성장군 의친왕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육군 3성 장군" 의친왕 편이다. 자료집 첫머리의 의친왕 소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서양 의술을 적극 들여오는 한편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으로 군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무슨 업적을 세웠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 시절을 보자. 고종실록에는 의친왕에게 육..

이왕가 사람들 2024.10.31

Rewriting History: The Myths and Realities of Prince Yi Kang’s Legacy

The fall of the Korean Empire was largely due to the role of King Gojong, who was an incompetent and foolish ruler. Sunjong, the next king, lacks presence even as much as the recent statue episode, leading people to pin their hopes on Prince Yi Kang. However, as Yi Bangja and even Yun Chi-ho pointed out earlier, Yi Kang was known for his reckless spending and was notoriously indulgent, especiall..

이왕가 사람들 202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