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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The fall of the Korean Empire was largely due to the role of King Gojong, who was an incompetent and foolish ruler. Sunjong, the next king, lacks presence even as much as the recent statue episode, leading people to pin their hopes on Prince Yi Kang. However, as Yi Bangja and even Yun Chi-ho pointed out earlier, Yi Kang was known for his reckless spending and was notoriously indulgent, especiall..

한국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3년, 일제강점기 공가로 호의호식했던 의친왕 이강 씨의 육남 이곤 씨가 부동산 사기 혐의로 검거되었다. 아래는 그 뉴스다. (평화신문 1953년 6월 14일)그는 왜 사기를 했나. 왕족 이곤씨의 생활 기록8.15.라는 역사적인 전환기에 부닥쳐 궁궐을 쫓겨나와 생활고라는 무자비한 질곡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이왕 후예들의 신산한 몰락 과정을 말하는 호개의 자료로서 소위 구왕궁을 팔아먹었다는 왕족 이강공의 육남 이곤(34세) 씨의 오늘에 이른 생활 기록을 소개해 보자. 이곤(일명 이명길)씨는 4253년(1920) 11월 4일 이강 공의 육남으로서 모친 김씨(이강공의 삼첩三妾)의 몸에서 출생한 후 8세 때에 일본에 도항하여 동경 입회소학교立會小學校를 졸업하고 동경 사립 입정중..

의화군 이강, 훗날 의친왕은 행실이 불량했다. 이는 이방자도, 윤치호도 지적한 바 있다. 일단 그에게는 낭비벽이 있었다.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의 미국 유학하며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목도했듯 그는 "유學"하며 공부에 별 뜻을 두지 않았다. 나라는 풍전등화에, 백성들은 주렸지만 의친왕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 매년 대한제국은 그에게 매년 4,000달러를 보내주었음에도 그는 미국의 대부업자들에게 30,000달러라는 거액의 빚을 졌다. 미국신문은 동양의 작은 나라 왕자의 거대한 씀씀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사진 아래 번역 있음) 돈을 기다리며 왕자의 코니아일랜드 방문, 대부업자의 청구서엔 3만 달러가. 뉴욕, 2월 6일: 한국 이희 왕(고종)의 셋째 아들인..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사망했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살설이 1919년 이래로 이어지고 있다. 매일신보에는 고종의 최후를 지켜본 의사들의 진술이 있다.태왕전하 훙거 환후 경과 전하께서는 며칠간 불면증에 시달리시더니 21일 아침 1시 45분 주무시던(暇寐睡眠) 중 돌연 우측 반신에 경련이 일어나고 이어 좌측까지 이어져 약 3분간 완화(緩解)되신 바 즉시 진료하니 오른쪽으로 누워 주무시는 위치에서 맥박은 115로 가지런해 조금도 이상이 없었고 체온도 36도 5분을 보여 정상 범위를 넘지 않았다. 동공은 모두 간신히 축소되어 반응에도 다시 이상이 있지 않았으며 동공은 좌우가 모두 간신히 축소가 되어 반응에 다시 이상이 있지 않았고 또 지각계에는 하등 이상(變調)을 보이지 않..

여성 선각자 하란사 또는 김란사"마지막 왕국"이라...깊어 가는 어느 날 밤이었다. 훌륭하게 차린 귀부인이 하녀들의 등불을 따라 스크랜튼 부인의 방을 두드렸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불을 껐다. “지금 내 속이 이렇게 캄캄합니다. 나에게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십시오.” 귀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입학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경향신문 1962.7.2., 대학가의 리창(裏窓), 이화여대(2)]위의 귀부인이 바로 남편의 성을 써서 하란사河蘭史로 불렸던 여성, 김란사다. 그녀는 평양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첫 미국 학위소지자다. 그녀는 귀국해서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여러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여권 신..

대한제국이 멸망한 건 암군이자 혼군 고종의 역할이 컸다. 순종은 최근 동상 에피소드만큼도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친왕 이강에게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방자도, 더 앞서 윤치호도 지적했듯, 돈씀씀이 헤프고 축첩질엔 당대 으뜸으로 방종하게 살았다. 그의 아이 낳은 여성이 몇 명, 또 간간히 기사에 나오는 애첩 몇 명. 하지만 정실부인에갠 아이가 없었다는. 그럼에도 상해 망명 기도 사건 탓에 그나마 다른 황실가 사람들 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 상해 망명 사건의 진실월경 직전에 붙잡히자 그는 억지로 끌려온 것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구사했다. 그의 진술 조서가 남아있는데, 그는 모든 문제를 전협 이하 대동단원의 탓으로 돌렸다. 팔아먹은 거다. 일제의 조작이라고 하나 일제가 조작할 이유는..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이 '공'위를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주장한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의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의친왕의 의병군자금 지원, 독립운동 지원 등을 보면서도 체포하지 못했던 일제는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하였고 평민으로 강등했으며, 일본 왕공족 전통에 따라 ‘공’위는 장남 이건에게 습공되었고 의친왕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결국 일본 큐슈 지역으로 강제로 압송되어 가게 되고,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 이준은 이강이 공의 작위를 빼앗기고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 #완은군 #이주용 #역사왜곡 #세종특별자치시 #의친왕1. "제국익문사비보장정"과 제국익문사몇 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제국익문사비보장정"이라는 책이 발견되었다. 고종 재위 시기 통신사(정보원)에 대한 규정으로 직제와 역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은 고종의 지휘 하에 실제 활동했던 듯 제국익문사를 그렸다.(또 무슨 소설도 하나 나온 모양이다.) 그러나 이 책자를 제외하곤 제국익문사에 관한 어떤 자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누가 참여했으며, 또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던 어느날 의친왕기념사업회에서는 이호석李浩奭의 유품으로 전한다며 도장 2과(성총보좌인, 제국익문사독리인)를 공개했다. 그러자 그간 고종 미화에 공들였던 전 ..

전 의친왕 이강 공은 1919년 망명 기도가 실패한 뒤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주장처럼 국내여행이 일절 금지되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이강 공은 예전과 같이 이곳 저곳 다니며 풍류를 즐겼다. 송암신정기를 썼던 1928년 음력 8월(양력 9월)에도 개성을 당일치기로 놀러갔다 오셨다. 이태진은 1927년 "12월부터 의친왕 자신도 경기도 경찰부의 경비(警備, 감시) 대상으로 올라 사회 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세종시 자료집, p.93)고 했는데, 사회생활을 금지당한 이강공이 했던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강 공은 1928년 3월 14일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조선총독과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 정무총감을 조선호텔로 초대해 오찬..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은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가 개최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의 자료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11월 23일 김구와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사동궁에 의친왕을 방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서의 활동을 요청하였고, 의친왕은 이를 수락하였고 운현궁 양관을 한국독립당 당사로 사용하고 백범 김구 선생의 숙소로 사용하게끔 배려하였다. 1947년 3월~1949년 8월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을 역임하였으나, 이외에는 일부러 적극적인 정치참여나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피했다.의친왕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까지 황실, 또는 의친왕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