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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의친왕 이강은 상해 임시정부의 망명 시도로 대한제국의 여타 다른 황족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시도를 제외하고 그의 독립운동은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음주벽이나 축첩으로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윤치호 역시 일기에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의친왕을 모셔가도 별반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여러 매스미디어 등에서 고종, 명성황후, 덕혜옹주 등을 독립의 아이콘으로 그려 내면서 마치 이것이 사실인냥 포장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가 2024년 6월 27일 시청 여민관에서 개최한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학술행사도 그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집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https://ww..

얼마 전 의친왕의 한 후손이 의친왕의 독립활동을 열거하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의친왕이 도산 안창호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해 스티븐슨 암살 사건을 지시" 그리고 대한제국 고종의 후손 단체 홈페이지에는 의친왕이 1902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써달라”며 금일봉을 전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가 인터넷을 타고 여과 없이 전파되면서 진짜 사실인냥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서 이를 검증해 보고자 한다. 공립협회를 의친왕이 설립했다고?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다. 하와이에 정착했던 교민 다수가 이 무렵 미국 본토로 생활 터전을 옮기고 있었다. 이에 1904년 로스..

상해망명 기도 사건 한 건으로 의화군義和君,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 이강은 일약 황실의 독립운동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실제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은사금(83만원)을 받았다. 또한 증빙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 상해망명 기도 역시 첩을 데리고 가겠다는 둥, 돈은 준비되었냐는 둥 하며 시간을 끌어 결국 붙잡히는데 기여했다. (잡히고 나서 꼬리자르기 했던 일은 아버지 고종과 꼭 닮았다.)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 특성 상 증거가 남지 않아"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직간접적 친일행적이나 주색에 매몰된 방탕한 생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불리한 자료는 조작이나 못믿을 이야기라며 눈을 돌리고 증거를 제시하면 식민사관 운운하며 프레임에 ..

동아일보 1921년 3월 8일자에 실린 기사다. 이강 공 전 애첩을 협박하고 오십원을 강탈시내 권농동 88번지 사는 양대현梁大鉉(38세)는 정영원鄭永源(41세)이란 사람과 공모하고 항상 상해上海 가정부(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금전을 모집하고자 시내 당주동 이강李堈 공의 전 애첩愛妾 이연연이를 협박하되 금전을 제공해야지 만일 내지 아니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하였으므로 연연이는 어찌 몹시 놀랐던지 오십원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처에서 금전을 강탈한 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각 1년 6개월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대로 복죄하였다더라.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에게는 여러 여성이 있었다.(개벽 기사를 보면 그가 이 방면에 얼마나 유명했던 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름을 남긴 이들은 정실이거나 자녀가 있..

"우리나라를 병탄 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 나도 한국의 일민一民이라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일 서민이 될지언정,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 제공諸公과 악수 동심하여 사생 간에 광복에 힘을 다하여 여러 동포가 고심하는 만의 일이라도 보조하려 하는 것이니 나의 이 결심은 하나는 자가自家의 복수를 위한 것이며 하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라.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1919.11.20.)에 실린 글이다. 늘 "독립운동가 의친왕" 대목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글이다. 의친왕은 임시정부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뜻을 알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래는 체포되고 며칠 뒤 이강 공이 조선총독 사이토(齋藤) 제독에게 전달한 서신이다. 여기서 이강은 이렇게 ..

개벽은 천도교에서 낸 잡지로 1920년 6월에 창간했다. 천도교의 대종사장 정광조는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교주 손병희와 의논하여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개벽은 그 결실이었다. 손병희와 의친왕은 친분도 깊었다니, 개벽에 소개된 기사는 의친왕을 잘 알고 쓴 글이리라. 아래는 1924년 7월 1일 발간된 제49호의 기사다. 개벽의 기사 제목은 색색형형의 경성 첩마굴 가경가증할 유산급의 행태 色色形形의 京城 妾魔窟 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번역하면 각양각색 경성의 첩 소굴, 놀랍고 가증스러운 유산계급의 행태글쓴이는 관상자觀相者우리 조선 사람치고는 웬만한 사람은 대개 다 첩이 있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이도 있다. 학교의..

위키백과 의친왕 항목에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 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고 했다. 또 나무위키는 “고종의 5남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유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의 조사 내용은 이를 의심케 한다. 후손을 비롯한 이강의 지지자들은 이 조사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큰 파장이 있어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로 가려 했던 사실은 당시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실린 정도로 감춰진 일도 아니었다. 또한 심문조서를 굳이 조작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망명을 주도했던 김가진金嘉鎭 은 의친왕이 “부족하지만” 순종은 창덕..

사동궁寺洞宮은,대한제국의 의친왕부義親王府, 일제강점기 이강李堈 공저(후에 이건李鍵 공저)다. 오늘날 관훈동, 인사동 일대 대지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부속 건물 하나만 남아 인사동 관광홍보관이 되었다. 그러면, 왜 이리 되었을까? 어디선가 게재한 글을 읽다보니 대한민국 정부가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 1945년 사동궁을 강탈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위 설명은 기본 팩트부터 틀렸다. 1945년은 정부수립 이전으로 이승만은 광복 후 막 귀국한 유력 인사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황실재산처리법은 1954년 9월에서야 제정되었다. 사동궁 지분이 쪼개진 건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광복 후 사동궁이 어떻게 해체되었는..

의친왕 이강의 적장자는 모모야마 겐이치(1909~1990)다. 옛 이름은 이건李鍵으로, 누가 시켜 개명한 게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이은 가족은 모두 조선명, 이건공은 성마저 왜놈식으로” 패망한 군국주의 일본과 같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황족들이 이제는 일반인민들과 같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거니와 이 황족들과 같이 왕족에서 물러난 이조 왕족의 자손들의 동향 한토막. 이태왕의 삼자인 이은(52세) 해방 후 시부야에서 과자 가게를 경영하며 조선이 그리워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말까지 하였다는데 지난번에는 조선식으로 자기 처 이본궁방자(48) 아들 구와 같이 개명까지 하였다 한다. 즉 이은李垠은 은흥垠興 처는 유희兪嬉 아들은 구학玖學으로 개명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은의 사촌인 이건공은 성명까..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할 때 제일의 부자는 왕실이었다. 왕실은 역둔토며 전국의 산림수택을 소유했다. 군함 하나 사는 데도 낑낑거렸던 대한국이었지만 이권이 있는 곳에는 황실이 있었다.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족 또는 왕족 가운데 어장 소유자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의화군, 대한제국의 의친왕, 일제강점기의 이강공, 즉 이강李堈이다.고종, 바다가 자기 것이라며 왕자에게 주다통영군 연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민 3,268명은 연명하여 이영재, 옥치기, 이주목, 김종혁, 황치종 등을 대표자로 해서 이강공 전하 소유의 어장(漁區)개방 청원을 총독부와 이강공저李堈公邸에 제출하였는데, 그 일에 대해 혹 이강공저 사무관 구로자키(黒崎) 이강공저 사무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강공 저하 소유의 어장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