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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대구 달성공원 앞, 이른바 "순종황제어가길"에는 순종 황제 동상이 있다. 순종 황제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일제에게 국권을 내주기 직전인 1909년 나라 남쪽을 한 바퀴 돌며(남순南巡이라고 부른다.)이곳에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구광역시 중구청이 2017년 7억원을 투입해 세운 것이다. 보통 동상하면 세종대왕, 이순신 등 존경받을 인물을 세우는데, 순종이라니... 게다가 십분 양보해 순종의 남순을 기념해 세웠다고 하지만 순종이 대구에 머문건 채 하루(24시간)도 안된다. 그런 까닭에 동상 만들 때부터 논란이 많았다. 대구광역시 중구청은 2024년 4월 19일 다시 4억원을 들여 이 동상을 철거하고 도로로 변경(원상복구)하기로 했다. 어쨌든 썼다 지웠다 쓴 편지도 아니고, 이 괴랄할 사업에 11억원을 투입한 셈..
동아일보 1921년 3월 8일자에 실린 기사다. 이강 공 전 애첩을 협박하고 오십원을 강탈 시내 권농동 88번지 사는 양대현梁大鉉(38세)는 정영원鄭永源(41세)이란 사람과 공모하고 항상 상해上海 가정부(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금전을 모집하고자 시내 당주동 이강李堈 공의 전 애첩愛妾 이연연이를 협박하되 금전을 제공해야지 만일 내지 아니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하였으므로 연연이는 어찌 몹시 놀랐던지 오십원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처에서 금전을 강탈한 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각 1년 6개월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대로 복죄하였다더라.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에게는 여러 여성이 있었다.(개벽 기사를 보면 그가 이 방면에 얼마나 유명했던 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름을 남긴 이들은 정실이거나 자녀가 있..
개벽은 천도교에서 낸 잡지로 1920년 6월에 창간했다. 천도교의 대종사장 정광조는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교주 손병희와 의논하여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개벽은 그 결실이었다. 손병희와 의친왕은 친분도 깊었다니, 개벽에 소개된 기사는 의친왕을 잘 알고 쓴 글이리라. 아래는 1924년 7월 1일 발간된 제49호의 기사다. 개벽의 기사 제목은 색색형형의 경성 첩마굴 가경가증할 유산급의 행태 色色形形의 京城 妾魔窟 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번역하면 각양각색 경성의 첩 소굴, 놀랍고 가증스러운 유산계급의 행태글쓴이는 관상자觀相者우리 조선 사람치고는 웬만한 사람은 대개 다 첩이 있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이도 있다. 학교의..
위키백과 의친왕 항목에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 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고 했다. 또 나무위키는 “고종의 5남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유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의 조사 내용은 이를 의심케 한다. 후손을 비롯한 이강의 지지자들은 이 조사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큰 파장이 있어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로 가려 했던 사실은 당시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실린 정도로 감춰진 일도 아니었다. 또한 심문조서를 굳이 조작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망명을 주도했던 김가진金嘉鎭 은 의친왕이 “부족하지만” 순종은 창덕..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의친왕, 그는 이 땅의 1세대 미국유학생이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카더라"통신이 난무하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둥, 한국인 유학생을 도왔다는 둥 미담은 많지만 근거는 없다. 하지만 출발할 땐 의화궁, 중간에 의친왕이 된 이강은 술에 취해 미국인들과 주먹다짐을 하다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미국 유학시절,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역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국의 아도니스, 의화군은둔국의 황제로 즉위할 수도 있는 깨어있는 오리엔탈리스트 미국 대학 출신 젊은이의 활기찬 경력꽃으로 뒤덮인 조끼를 갖춘 87벌의 양복, 그리고 미국 여성과 세 번의 연애를 한 영웅 그가 코니 아일랜드에서 즐긴 것그의 예언적인 발언들 로베르투스 러브(Robertus Love) ..
1월 황족 친목회는 이우李鍝 공 전하의 주최로 26일 오후 3시부터 시부야 도키와마츠(常盤松)의 어전에서 지치부노미야(秩父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를 필두로 각 황족 분들이 모여 해군종군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를 초청해 “전장의 흙먼지를 줍다”는 제목으로 소강부대遡江部隊의 활약 관전담을 약 1시간에 걸쳐 청취, 마치고 다과회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고 5시에 산회했다. (사진은 요시카와 에이지 씨)[경성일보 1938.11.27.] 이날 행사의 강연자인 요시카와 에이지는 20세기 일본의 대표적 통속소설 작가로 삼국지, 미야모토 무사시 등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이야기했다는 소강부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부대'를..
의친왕 이강의 적장자는 모모야마 겐이치(1909~1990)다. 옛 이름은 이건李鍵으로, 누가 시켜 개명한 게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이은 가족은 모두 조선명, 이건공은 성마저 왜놈식으로” 패망한 군국주의 일본과 같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황족들이 이제는 일반인민들과 같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거니와 이 황족들과 같이 왕족에서 물러난 이조 왕족의 자손들의 동향 한토막. 이태왕의 삼자인 이은(52세) 해방 후 시부야에서 과자 가게를 경영하며 조선이 그리워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말까지 하였다는데 지난번에는 조선식으로 자기 처 이본궁방자(48) 아들 구와 같이 개명까지 하였다 한다. 즉 이은李垠은 은흥垠興 처는 유희兪嬉 아들은 구학玖學으로 개명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은의 사촌인 이건공은 성명까..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병참 지원을 위해 조선의 자원을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의 개명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총후銃後(후방)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며 결성한 단체가 있었으니 바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다. 금차는 금비녀를 말하는데, 마치 예전 금 모으기 운동처럼 금비녀를 모아 전쟁 비용에 보태자는 취지에서 만든 단체다. 중일전쟁 발발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1937년 7월 말 경기여고보에서 결성했다. 이날 바로 김복수金福綏 회장은 금비녀 십 수 개를 들고 용산 조선군사령부로 찾아가 경성요지방위사령관 후카자와 도모히코(深沢友彦)중장에게 헌납식을 거행했고, 이를 영원토록(?) 기념하기 위해 당시 명성 있던 화가 김은호金殷鎬를 불러 그림으로 남겼다. 이것이 훗날 김은호의 대표작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