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삼국지) 조자룡, 전설이 되다.(후편) 본문
(전편에 이어)
선주가 가맹관葭萌還에서 유장劉璋을 공격하며 제갈량諸葛亮을 부르자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張飛 등을 이끌고 함께 강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을 평정하고 강주江州에 다다랐다. 따로 조운을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여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만났다. 성도를 평정하고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운별전雲別傳): 익주益州가 평정되자 마침 성도成都 안 집들과 성밖 원지園地, 상전桑田을 장수들에게 나눠주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운이 꾸짖으며 말했다. “곽거병霍去病은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며 집안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거늘 지금의 국적은 흉노 만이 아닌데 어찍 평안을 구할 때란 말인가. 그저 천하가 모두 평정되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래 땅을 경작하면 될 뿐이다. 익주 인민은 애초 병란에 시달렸던 만큼 전택은 이들에게 돌려주어 지금부터 편히 지내며 생업으로 복귀해야 비로소 역역과 조세도 거두고 환심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선주가 이를 따랐다. 하후연夏侯淵이 패하자 조공曹公은 한중漢中 땅을 놓고 겨루며 양곡을 북산北山 아래까지 수천 만 자루를 날라두었다. 황충黃忠이 이를 빼앗을 수 있다고 여겨 운은 군대를 보내 황충을 따라 양곡을 빼앗았다. 그러나 황충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단촐하게 수십 기를 끌고 군영 밖으로 나가 황충 등을 맞이했다. 이때 조공이 병력을 대거 일으켜 보냈니 조운은 조공의 선봉군대와 맞닥드렸다. 막 전투가 시작되고 대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세가 밀렸고 결국 진영이 뚫리며 치고 박고 난전이 펼쳐졌다. 조공의 군대가 패해 물러나면서 다시 군대를 수습하고 조운이 적을 쓰러뜨리며 군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수 장저張著가 창을 맞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장저를 데리고 군영으로 돌아왔다. 조공의 군대가 군영까지 따라왔으나 이때 면양장沔陽長 장익張翼이 조운의 영내에 있었는데, 장익은 문을 닫고 막으려 했지만 조운이 영내로 들어와 다시 문을 열고 깃발을 쓰러뜨리고 북 소리를 중지시켰다. 조공의 군대는 조운이 복병을 숨겼다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조운이 천둥같은 북소리로 하늘을 뒤흔들며 조공의 군대 뒤로 융노를 쏘아대자 조공의 군대가 혼비백산하여 서로 뒤엉켜 짓밟으면서 한수漢水에 떨어 죽은이가 매우 많았다. 선주가 이튿날 아침 직접 조운의 군영으로 찾아와 어제 전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룡子龍은 몸 전체가 담력으로구나.” 잔치가 어둑해질 때가지 이어졌다. 군중에서 운을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 불렀다. 손권孫權이 형주荊州를 습격하자 선주先主가 대노하여 손권을 토벌하려 했다. 조운이 간언하길, “국가의 도적은 조조曹操이니 손권孫權이 아닙니다. 먼저 위를 멸하면 오는 저절로 복속될 것입니다. 조조가 비록 죽었어도 아들 조비曹丕가 찬탈하여 도적질하여 백성들의 마음에도 응어리를 만들었으니 먼저 관중을 도모하고 황하(河)와 위수(渭)를 거슬러 올라가 흉역을 토벌하면 관동關東의 의로운 지사들이 곡식을 싸들고 말을 달려 우리 군대(王師)를 맞이할 것입니다. 위를 도모하지 않고 먼저 오와 싸우는 것은 한 차례 전쟁일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선주가 듣지 않고 결국 동정東征을 했고 조운에게 강주江州를 다스리게 했다. 선주가 자귀秭歸에서 위기에 처하자 조운은 영안永安으로 병력을 보냈고 (그러자) 오군吳軍이 물러갔다.] 건흥建興원년(223) 중호군中護軍・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에 올랐다. 5년 제갈량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이듬해 제갈량이 출병할 때 사곡도斜谷道로 나와 응원했으나 조진曹真이 대군을 보내 막자 제갈량이 조운과 등지鄧芝를 보내 막았다. 직접 기산祁山을 공격했지만 조운과 등지鄧芝의 병력은 약하고 적은 강해서 기곡箕谷에서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무리를 거두어 잘 막아내어 대패는 면할 수 있었다. 철수한 뒤 진동장군鎭軍將軍으로 벼슬이 깎였다. [운별전雲別傳: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街亭에서 군대를 물렸을 때는 병장기를 기록할 수 없었는데(그 정도로 많이 잃고 흩어졌는데), 기곡箕谷에서 군대가 물러났을 때는 병장가가 처음과 마찬가지로 잃은 것도 없으니 무슨 이유인가” 등지가 대답했다. “조운이 몸소 파악한 뒤 군자비품을 조금도 버리지 않도록 했으니 병장기를 잃어버릴 일이 없었습니다.” 운이 군자를 여유있게 관리하자 제갈량이 (남은 군자를) 장사들에게 나눠주게 했다. (그러자) 운이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를 얻지 못했는데 어찌 나눠준단 말입니까. 그 물자는 모두 적안부고赤岸府庫로 넣어두었다가 10월 겨울에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제갈량이 매우 옳다고 여겼다.]
7년 죽었고 (사후) 순평후順平侯로 추증되었다.
애초 선주 때는 오직 법정法正 만 시호를 받았다. 후주 때에는 제갈량의 공덕은 세상을 덮을 정도였고 장완蔣琬과 비위費禕는 국가의 무게를 짊어졌으니 시호를 받았다. 진기陳祗는 총애하는 시신으로 특별히 아꼈기에, 하후패夏侯霸는 멀리서 귀순하였기에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관우關羽・장비張飛・마초馬超・방통龐統・황충黃忠과 조운은 시호와 추증관호를 받았으니 당시 영예로 여겼다. [운별전雲別傳에 실린 후주의 조서: “운은 옛날 선제를 따라 공적이 이미 현저하다. 짐은 어릴적 어려운 시기를 거칠 때 그의 충성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시호로 원훈을 기리고자 하니 운에게 마땅한 시호를 논의해 보도록 하시오.” 대장군大將軍 강유姜維 등은 논의하기를, 조운은 옛날 선제를 호종하며 쌓은 공적이 이미 현저하고 천하를 경영하며 법도를 받들었으니 공로를 새기기 충분하다. 당양當陽의 전투에서 의로움은 금석金石을 뚫을 듯하고 충성은 숙위의 으뜸이었으니 임금은 그 보답을 생각하며 예를 두텁게 내리니 신은 그 죽음을 잊는다. 죽은 자는 알려 잊히지 않게 하고 산 자들은 은혜에 감동해 몸받치게 한다. 삼가 시호를 정하는 법[諡法]에 비추어 온유하고 현명하며 자혜로운 것을 ‘순順’이라고 하고 일을 맡아 체계를 갖춘 것을 ‘평平’이라 하고 화란을 극복하고 평정한 것도 ‘평平’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는 순평후로 하십시오.] 조운의 아들 통統이 뒤를 잇고 관직이 호분중랑虎賁中郎 독행령군督行領軍까지 올랐다. 차자 광廣은 아문장牙門將이 되어 강유姜維를 따라 답중沓中까지 가서 군진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평하길,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을 대적했던 일세의 호신(虎臣)으로 칭송되었다. 관우는 조공에게 은혜를 갚고 장비는 의롭게 엄안嚴顔을 풀어주었으니 모두 나라의 사인으로서의 풍모를 지녔다. 그러나 관우는 사납고 자만심이 셌고 장비는 포악하고 은혜롭지 못해 그 단점 탓에 말로를 자초했으니 이는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마초는 이민족을 제압하고 용맹을 떨쳤으나 집안이 망했으니 애석하다! 궁핍함이 결국 크게 될 수 있었으니 결국은 득이 되었던 게 아닐까. 황충과 조운은 굳세고 용맹을 떨쳐 모두 조아爪牙가 되었으니 (한漢나라 때) 관영灌嬰이나 하후영[滕公: 夏侯嬰] 같은 이들이 아니겠는가?
先主 自葭萌還攻劉璋, 召諸葛亮. 亮率雲與張飛等俱泝江西上, 平定郡縣. 至江州, 分遣雲從外水上江陽, 與亮會于成都. 成都既定, 以雲爲翊軍將軍.[[雲別傳] 益州既定, 時議欲以成都中屋舍及城外園地桑田分賜諸將. 雲駮之曰: “霍去病, 以匈奴未滅, 無用家爲, 今國賊非但匈奴, 未可求安也. 須天下都定, 各反桑梓, 歸耕本土, 乃其宜耳. 益州人民, 初罹兵革, 田宅皆可歸還, 今安居復業, 然後可役調, 得其歡心.” 先主即從之. 夏侯淵敗, 曹公爭漢中地, 運米北山下, 數千萬囊. 黃忠以爲可取, 雲兵隨忠取米. 忠過期不還, 雲將數十騎輕行出圍, 迎視忠等. 值曹公揚兵大出, 雲爲公前鋒所擊, 方戰, 其大眾至, 勢偪, 遂前突其陳, 且鬭且卻. 公軍敗, 已復合, 雲陷敵, 還趣圍. 將張著被創, 雲復馳馬還營迎著. 公軍追至圍, 此時沔陽長張翼在雲圍內, 翼欲閉門拒守, 而雲入營, 更大開門, 偃旗息鼓. 公軍疑雲有伏兵, 引去. 雲雷鼓震天, 惟以戎弩於後射公軍, 公軍驚駭, 自相蹂踐, 墮漢水中死者甚多. 先主明旦自來至雲營圍視昨戰處, 曰: “子龍一身都是膽也.” 作樂飲宴至暝, 軍中號雲爲虎威將軍. 孫權襲荊州, 先主大怒, 欲討權. 雲諫曰: “國賊是曹操, 非孫權也, 且先滅魏, 則吳自服. 操身雖斃, 子丕篡盜, 當因眾心, 早圖關中, 居河・渭上流以討凶逆, 關東義士必裹糧策馬以迎王師. 不應置魏, 先與吳戰;兵勢一交, 不得卒解.” 先主不聽, 遂東征, 留雲督江州. 先主失利於秭歸, 雲進兵至永安, 吳軍已退.] 建興元年, 爲中護軍・征南將軍, 封永昌亭侯, 遷鎭東將軍. 五年, 隨諸葛亮駐漢中. 明年, 亮出軍, 揚聲由斜谷道, 曹真遣大衆當之. 亮令雲與鄧芝往拒, 而身攻祁山. 雲・芝兵弱敵彊, 失利於箕谷, 然斂衆固守, 不至大敗. 軍退, 貶爲鎭軍將軍. [雲別傳曰: 亮曰: “街亭軍退, 兵將不復相錄, 箕谷軍退, 兵將初不相失, 何故?” 芝答曰: “雲身自斷後, 軍資什物, 略無所棄, 兵將無緣相失.” 雲有軍資餘絹, 亮使分賜將士, 雲曰: “軍事無利, 何爲有賜?其物請悉入赤岸府庫, 須十月爲冬賜.” 亮大善之. ]
七年卒, 追諡順平侯.
初, 先主時, 惟法正見諡;後主時, 諸葛亮功德蓋世, 蔣琬・費禕荷國之重, 亦見諡;陳祗寵待, 特加殊奬, 夏侯霸遠來歸國, 故復得諡;於是關羽・張飛・馬超・龐統・黃忠及雲乃追諡, 時論以爲榮.[雲別傳載後主詔曰: 「雲昔從先帝, 功積既著. 朕以幼沖, 涉塗艱難, 賴恃忠順, 濟於危險. 夫諡所以敍元勳也, 外議雲宜諡. 」大將軍姜維等議, 以爲雲昔從先帝, 勞績既著, 經營天下, 遵奉法度, 功效可書. 當陽之役, 義貫金石, 忠以衞上, 君念其賞, 禮以厚下, 臣忘其死. 死者有知, 足以不朽;生者感恩, 足以殞身. 謹按諡法, 柔賢慈惠曰順, 執事有班曰平, 克定禍亂曰平, 應諡雲曰順平侯.] 雲子統嗣, 官至虎賁中郎, 督行領軍. 次子廣, 牙門將, 隨姜維沓中, 臨陳戰死.
評曰: 關羽・張飛皆稱萬人之敵, 爲世虎臣. 羽報效曹公, 飛義釋嚴顏, 並有國士之風. 然羽剛而自矜, 飛暴而無恩, 以短取敗, 理數之常也. 馬超阻戎負勇, 以覆其族, 惜哉!能因窮致泰, 不猶愈乎!黃忠・趙雲彊摯壯猛, 並作爪牙, 其灌・滕之徒歟?
三國志 蜀書 卷36 關張馬黃趙傳(趙雲), p.948~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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