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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후연의 마지막 황제, 폭군 모용희

자불어 2023. 9. 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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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에 수록된 후연의 마지막 군주 모용희의 전기다. 무공은 탁월했지만 어려서는 형수 정씨丁氏와 간통하고, 나중엔 부씨苻氏 자매에게 빠져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십육국 시대는 워낙에 폭군이 많았던 터,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광개토대왕과 동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모용성 때에는 장수로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과 함께 영토 700여 호, 백성 5천 여호를 빼앗았는데, 정작 자신이 군주일 때는 광개토대왕에게 발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용희 慕容熙

 
희熙는 자가 도문道文으로 모용수慕容垂의 작은 아들이다. 처음에 하간왕河間王에 분봉되었다. 단속골段速骨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모용씨 여러 왕이 살해당했지만 희는 고양왕高陽王 숭崇에게 총애를 받아 죽임을 면할 수 있었다. 난한蘭汗이 모용보를 죽인 뒤 희를 요동공遼東公으로 삼아 종사宗祀를 잇게 했다. 모용성慕容盛이 즉위하자 작을 낮추어 공公으로 삼고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영중령군領中領軍에 배수했다. 고구려高句驪, 거란契丹 원정에 종군했는데 용기가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다. 모용성이 “동생의 영웅적인 모습에서 세조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홍은 그 정도가 못될 듯합니다.” 라고 했다. 모용성이 죽자 태후 정씨가 나라에 어려움이 많아 어른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평원공 모용원을 바랬으나 정씨의 뜻은 희에 있어 결국 태자 정을 폐위하고 희를 맞이하여 입궁케 했다. 군신들은 희더러 원에게 양위하기를 권했으나 원이 고집스레 희에게 양보하면서 결국 희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모용희는) 대신 단기段璣, 진흥秦興 등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그리고는 모용원에게는 혐의를 씌워 자살하게 했다. 원의 자는 도광道光으로 모용보의 넷째 아들이다. 사죄死罪 이하를 사면하고 (연호를) 광시光始로 개원했다. 북연대北燕臺의 이름을 대선우대大單于臺로 바꾸고 좌우보左右輔를 설치해 상서尙書 다음에 두었다.
애당초 모용희는 정씨와 간통 관계였던 까닭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나중에 부귀인苻貴人을 총애하게 되자 정씨가 원한을 품고 저주하여 형의 아들 칠병상서七兵尚書 모용신慕容信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할 음모를 꾸몄다. 희가 이를 듣고 몹시 분노해 했다. 정씨를 핍박해 자살케 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모용신을 죽였다.
모용희가 북원北原에 수렵 나갔는데 석성령石城令 고화高和가 사례교위司隸校尉 장현張顯을 살해하고 문을 닫고 걸고 희의 길을 가로 막았다. 희가 기병을 이끌고 반격하자 화의 군대는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고 희가 들어가 그를 죽였다. 이에 주군州郡 및 선우팔부單于八部의 장로를 동궁으로 불러 모아 병이나 어려움이 없는지 물었다.
용등원龍騰苑을 크게 지었는데, 좌우 너비가 10여 리에 달했고 투입한 인력이 2만명이었다. 원내에 경운산景雲山을 쌓았으니 그 너비가 500보, 봉우리 높이가 17장이었다. 또 소요궁逍遙宮, 감로전甘露殿을 지으니 이어진 방이 수백 개로 전각이 서로 이어졌다. 천하거天河渠를 개착하여 물길을 내 궁으로 들였다. 또 소의昭儀 부씨苻氏를 위해 곡광해曲光海, 청량지清涼池를 팠다. 여름 더위가 심하자 사졸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해 갈증에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희가 성남城南에서 놀다가 큰 버드나무 아래 멈춰섰는데, 어떤 노인의 소리가 들렸다. “대왕, 그만하십시오.” 이가 이를 싫어해 나무를 베었는데, 그 안에서 한 길이 넘는 뱀이 나무에서 기어나왔다.
귀빈貴嬪 부씨를 황후로 세웠다. 사죄 이하 죄수를 사면했다.
희가 북쪽의 거란을 습격해 크게 격파했다.
소의昭儀 부씨苻氏가 죽자 민황후愍皇后란 시호를 내리고 부모苻謨를 태재太宰로 추증하고 문헌공文獻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부씨 부인 두 명은 모두 아름답고 농염하였으며 몰래 다니며 연회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으나 희는 이를 금하지 않았다. 뵙길 청하면 반드시 따랐고 형벌과 상사의 큰 정령이 모두 두 사람을 통해 움직였다. 처음에 소의에게 병이 있어 용성인 龍城人 왕온王溫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나 얼마 뒤 사망했다. 희가 그의 망령된 행동에 분노하여 수레가 다니는 문에 세워좋고 사지를 해체한 뒤 불태웠다. 황후는 들판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여 희가 그녀을 따라 북쪽으로 백록산白鹿山에 오르고 동쪽으로는 청령青嶺을 넘고 남쪽으로는 창해滄海까지 가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했고 사졸들은 늑대에게 뜯기거나 추위에 얼어죽은자가 5천여 명에 달했다. 마침 고구려가 연군燕郡을 침입해 백여 명을 죽이고 잡아갔다. 희가 고구려를 정발하자 부씨도 따라나서 충거衝車와 지도地道로 요동을 공격했다. 희가 말했다. “도적 놈의 성을 깡그리 없애면 짐이 황후와 연輦을 타고 들어갈 것이니 장수들이 선봉에 서겠다는 이야긴 들어주지 않겠다.” 이에 성 안에서 엄중하게 방비하니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마침 폭설에 폭우가 내려 사졸이 많이 죽었고 결국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업鄴의 봉양문鳳陽門을 본 떠 홍광문弘光門을 만들고 삼층 누각을 올렸다.
모용희와 부씨가 거란을 습격했는데 그 무리가 많은 것을 보고 꺼려 그냥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부씨가 듣지 않고 결국 치중輜重을 버리고 가벼히 고구려를 습격해 3천리를 들어갔다. 병들고 얼어죽은 사졸과 말이 시체가 길바닥을 뒤덮었다.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모용보의 여러 아들을 모조리 죽였다. 대성大城 비여肥如 및 숙군宿軍을 구니예仇尼倪는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아 숙군宿軍에 주둔케 하고 상용공上庸公 의懿는 진서장군鎭西將軍, 유주사자幽州刺史로 삼아 영지令支에 주둔케 하고 상서尙書 유목은 劉木진남대장군鎮南大將軍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삼아 비여肥如에 주둔하게 했다.
부씨를 위해 승화전承華殿을 짓는데 승광전承光殿보다 한 배 더 높이 만든다고 북문北門에서 흙을 옮겨 오게 해 흙과 곡식의 가격이 같아졌다. 전군典軍 두정杜靜이 관을 이고 궐을 찾아가 상서를 올려 간언하였다. 희는 몹시 분노해서 그를 참수했다. 부씨는 늘상 여름에는 얼린 물고기 회를 먹고 싶어 했고 한겨울에는 생지황을 찾았다. 관리들에게 명해 닥달해도 구할 수 없자 구하지 못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그 포학함이 이와 같았다. 부씨가 죽자 희가 슬피 울며 몸부림치는 것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듯했다. 그 시신을 안고 어루만지며 말했다. “몸이 이제 차갑게 되니 운명도 여기서 끝이구나!” 이내 쓰러져 기절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대렴大斂을 마치고 다시 관을 열어 교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입는) 참최 상복을 입고 죽을 먹었다. 신료들에게 궁으로 들어와 곡을 하고 승려들에겐 소복을 입혔다. 관리에게 곡을 제대로 하는 지 검사하게 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는 충효롭다 여기고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는 죄를 범했다고 다스렸다. 그러자 군신들이 두려움에 떨며 매운 것을 삼켜가며 눈물을 흘렸다. 모용륭慕容隆의 처 장씨張氏는 희의 형수로 미색이 빼어나고 사려 깊었다. 희가 부씨와 순장시키려 하자 장씨는 수의를 훼손하고 안에 저주하는 물건을 넣어 결국 사사되었다. 세 딸이 머리를 조아리며 애도를 표하고 싶다고 했으나 희는 허락하지 않았다. 공경 이하 백성에게 제서를 내려 백성(戶)를 동원하여 묘를 짓느라 관아의 창고를 거덜냈다. 아래로 세 개의 샘을 막고 둘레에 수리 물길을 냈다. 안에는 상서尙書 팔좌八坐의 초상을 그려 넣었다. 희가 “참 잘 만들었다. 짐도 나중에 이 무덤 황후의 곁으로 갈 거다.”라고 하자 식견있는 이들은 모두 불길하다 여겼다. 그 우복야右僕射 위구韋璆 등은 모두 순장될까 두려움에 떨며 목욕재계하고 죽음을 기다렸다. 부씨의 무덤을 휘평릉徽平陵이라 했다. 희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부씨의 장례 행렬을 따라갔다. 상여(轜車)가 너무 높고 커서 북문을 헐고야 나갈 수 있었다. 장로들이 몰래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길, “모용씨 스스로 저 문을 부수니 오래 가지 못할 듯하오.”
중위장군中衞將軍 풍발馮跋, 좌위장군左衞將軍 장흥張興이 앞서 모두 일에 연루되어 달아났다. 희의 정치가 잔인무도하여 풍발의 종형 만니萬泥 등 22인이 맹약을 맺고 모용운慕容雲을 주군으로 추대하고 상방尙方의 무리 5천여인을 동원해 문을 닫고 지켰다. 중황문中黃門 조락생趙洛生이 달아나 고발하자 희熙가 말했다. “쥐새끼같은 도적놈에 불과하다 짐이 돌아가 주살할 것이다.”라고 한 뒤 머리를 묶고 갑옷을 걸쳐 입고 말을 달려 난을 진압하러 돌아갔다. 밤에 용성龍城에 당도해 북문北門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결국 패배해 용등원龍騰苑으로 달아났다. 미복차림으로 숲속에 숨어있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운이 그를 잡아 죽이고 그 아들들과 함께 성북쪽에 묻어버렸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 재위 6년만이었다. 운이 그를 부씨의 무덤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소문황제昭文皇帝라고 했다.
모용수가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8년부터 참위한 이래 모용희까지 4대에 걸쳐 24년 이어지다 안제安帝 의희義熙3년 멸망했다. 앞서 동요에 “짚단(藳) 한 다발, 양쪽 끝을 마름하고 까까머리 꼬마가 와서 연나라를 멸망케하네.(一束藳, 兩頭然, 禿頭小兒來滅燕)”라고 했다. 짚단 고(藳) 자는 위에 풀 초(艸), 아래 벼 화(禾)가 있고 양쪽 머리 마름한다는 것(兩頭然)라는 것은 화(禾)와 초(艸)가 모두 사라져 높을 고(高)자가 된다는 말이다. 운雲의 부친은 이름이 발拔이고 어렸을 적 자가 독두禿頭였다. 게다가 [꼬마(小兒)는] 셋째 아이(三子)를 뜻하니 운은 (발의) 셋째 아들(季)이다. 희는 결국 운에게 멸망 당했으니 그 노랫말처럼 된 것이다.  * [ ] 안은 원문에서 누락된 글자로 보인다.
- 晉書 卷124 慕容熙, pp.3104~3108.
 

 
(진서 권124의 다음편은 아래 모용운으로 이어집니다.)

(진서) 북연의 초대 황제, 고구려계 모용운

후연後燕과 북연 北燕을 잇는, 북연 초대 황제 모용운慕容雲의 전기로 진서晉書(재기載記)에 실려 있다. 모용운은 본디 고씨로 고구려 왕족의 지파였다. 고구려 출신인 모용운이 천왕天王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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