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개원통보? 개통원보? 본문
아침에 멀뚱멀뚱 일어나 연말 마감해야 할 것을 둘러보다 우연히 남송 요관姚寬의 서계총어西溪叢語를 읽게 되었다. 찾던 내용과 상관없이 개원통보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개원통보하면 다들 헷갈려하는 것이,
1. 개원통보는 당대의 동전으로 당 현종 개원연간의 물건이 아니라 당 고조 무덕4년(621)에 처음 주조한 것이다. 이 내용은 당서 식화지에 나오기 때문에 빼박캔트,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많이들 틀린다.
2. "개통원보"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당육전에서는 개통원보라고 했다며... 그러나 아래 요관이 명쾌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당나라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궁금한 이 하나 없었으랴. 개원통보이니 개통원보로 잘못 읽고 우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 궁금하면 아래 요관의 글을 읽어 보시라.
당서 식화지에 “무덕4년(621) 개원통보開元通寶를 주조하니 전의 둘레 8방, 중량 2수 4참으로 10전을 모으면 1량이 되어 (하나하나의) 무게나 크기의 평균을 이루도록 했다. 글은 팔분서, 전서, 예서 3종의 서체를 사용했다.”라고 했다. 또 “개원26년(738) 이후 동전이 매우 조악해져 각지에 감을 두고 개원통보전을 주조하게 하자 경사京師의 창고를 가득 채웠다. 숙종 상원원년(760) 개원 구전은 하나에 10개로 환산하게 했다”라고 했다.
공의부孔毅夫는 “개원통보전은 급사중 구양순歐陽詢이 그 글을 짓고 썼는데 돌려서 읽을 수도 있었다. 일반에서는 이를 모르고 개원전을 명황(당 현종)이 주조한 것으로 안다. 육전六典에서는 개통원보(육전에서는 개통원보라 했으나 본디 개원통보로 교씨의 교정에 따라 수정했다. 공평중이 공씨잡설 권4에서 개통원보라고 했다.)로 썼다.”고 했다. 사마광司馬光은 “설당薛璫의 당성운도唐聖運圖는 ‘처음 거푸집을 진상했을 때 문덕황후文德皇后가 손톱으로 긁어 동전 위에 손톱 흔적이 있다’고 했고 능반凌璠의 당록정요唐錄政要는 이를 두황후竇皇后가 한 것이라고 했다. 이때 두황후는 이미 붕어했고 문덕황후는 책립되기 전으로 이는 모두 취할 수 없다.”고 했다. 이심언李審言은 기문記聞에서 “당대의 동전 명문은 건원, 개원, 그리고 중보, 통보가 있는데, 세속에 천한 것을 일컬어 ‘건중乾重’, ‘개통開通’이라고 한다. 조정의 사인도 이런 말을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고 했다. 마영경馬永卿은 “개원통보는 당 289년간 이 동전을 주조했고 낙(양), 병(주), 유(주), 계(주) 등의 주에 감을 두었다. 개원전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으로 명황의 연호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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