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만주국 학자가 쓴 나진옥평전, 첫번째 이야기 본문
아래 글은 진방직陳邦直의 나진옥羅振玉傳(新京: 滿日文化協會: 康德10(1943))을 번역한 것이다.
동년시대童年時代
상우 나씨의 가계 上虞羅氏家世
나진옥羅振玉 선생의 원적은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이다. 증조 돈현공敦賢公(자 희재希齋)은 가경년간(1796~1820) 염하鹽河의 막부에서 관직 생활을 하며 강회江淮를 오가다가 결국에 강소성 회안부淮安府에 터를 잡았다. 돈현공은 아들이 9명 있었는데, 셋째는 이름이 학상鶴翔(자 익운翼雲)으로 그가 선생의 조부다. 강소성 고우주高郵州 지주知州를 역임했다. 학상공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장자가 수훈樹勳(자 요흠堯欽)으로 그가 선생의 부친이다. 강녕江寗 청하현승淸河縣丞을 역임했다. 100여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강남의 문인 집안(書香世族)이다.
고향 회안 故鄕淮安
회안淮安은 장강長江 북안으로 회하淮河와 사수泗水가 모이는 곳으로 풍광이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강북의 이름난 도회가 되었다. 산업은 미곡을 중심으로 진포철도津浦鐵道(天津- 浦口(南京)線)가 부설되기 전까지는 남중국의 조운이 이곳에 모두 모여 예로부터 상업이 번성하고 문화가 발달했다.
선생은 동치5년(1866) 6월 28일 자시에 회안부 남문南門 경루更樓 동쪽에 있던 집에서 태어났다. 젖먹이 때 이름은 옥린鈺麟이고, 조금 크자 수훈공은 보옥寶鈺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뒤에 절강성 소흥현 동자시童子試에 응시하며 이름을 진옥振鈺으로 바꾸고 자를 식여式如라고 했다. 시험을 치른 뒤 다시 진옥振玉으로 개명하고 자를 숙온叔溫 또는 숙언叔言이라고 했다. 만년에는 스스로 설당雪堂이라 했다가 다시 정송노인貞松老人이라고 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다 啓蒙讀書
선생은 형제 중에 셋째로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5세 때에야 젖을 끊었다. 이듬해 가숙家塾에 들어가 산양山陽 이민강李珉江 선생(자 도원導源)을 따라 글자를 배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1년에 절반은 병상에 있다보니 책을 읽는 시간이 매우 적었다. 그러나 선생의 조모 방태부인方太夫人이 하루의 일과를 엄하게 관리하여 아파 누워있는 게 아니라면 가숙에 나와 바른 자세로 앉아 형들의 책 읽는 소리를 듣게 했다. 그래서 종종 기억해 두었다가 암송할 수 있게 되었다. 7~8세 때 대략 문의를 깨쳤다. 민강 선생은 그가 일찍부터 총명하다고 여겼으나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선생의 부친 요흠공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나중에는 원대한 꿈을 이룰 겁니다.”
선생의 조모 방태부인은 명문가 출신으로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고 가정을 엄정하게 일궜으며 특히 여느 다른 손자보다 선생을 아꼈다. 일찍이 친히 스스로 책을 읽게끔 하여 선생의 어린 시절을 춘풍화우春風化雨 속에 성장하게 함으로써 성정이 공순하고 오락에 빠지지 않게 했다. 이 많아 9살에야 사자서四子書를 끝내고 13세에 비로소 역易, 시詩, 서書 삼경三經을 마쳤다. 이때 처음으로 시, 문, 단편 논설을 지었는데 민강 선생이 꽤 조리있다며 칭찬해주었다. 14, 5세에 예기禮記, 춘추春秋, 좌전左傳을 읽어 오경五經을 마무리했다.
수재 제9등 第九名秀才
당시 중국에서는 과거제도가 시행되던 때로 선생은 16세에 제거문制擧文(팔고문八股文)을 배우로 이해 3월에 요흠공이 선생의 형들을 상우현으로 돌려보내 동자시(현고縣考, 소고라고도 부른다.)에 응시하게 했다. 선생도 함께 하라고 했다. 그때 선생도 팔고문을 지었으나 간신히 절반을 채울 수 있었다. 중도에 병에 걸려 항주에 도착하니 더 심해져 여사에 누웠다. 선생은 본디 후종이 있었는데, 이때 심해져 스무 날 동안 물과 간장도 네 대로 넘기지 못했다. 의사가 탕제를 투약하고야 비로소 먹고 마실 수 있었다. 효정황후가 돌아가셔서 국상으로 시험이 중단되고 선생도 쾌유되었다. 그 뒤 5월 초 소흥에 올라가 시험에 응시하고 시험을 마친 뒤 상우현 현학 제구명으로 합격해 수재가 되었다.
선생은 현학에 들어가고 나서도 제거문을 완성할 수 없어서 과장에 들어가서 노력했으나 스스로 떨어질 게 뻔하다며 두려워했다. 의도치 않게 정장은 경고를 답하는 것이었고 문제로 “노귤하숙부盧橘夏熟賦(노귤하숙은 ‘비파(노귤)이 여름에 익다’는 뜻으로 사마상여司馬相如 상림부 상림부上林賦의 구절이다. 즉 상림부를 가리킨다.)”가 나왔다. 시험이 끝나자 학사 장제정이 선생을 일등(제일명)으로 꼽았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쓴 글이라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미봉(밀봉)을 뜯어 보았더니 열여섯이라기에 더더욱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에 학당에서 면접시험을 열어 답안지(부권)을 꺼내어 자신이 쓴 것을 설명해 보라 했다. 선생이 하나하나 답하자 그제야 의구심을 떨쳐버렸다. 이어 평소 공부한 것을 상세하게 묻더니 의심했다 일러주며 “내가 여러 고을의 시험을 주관했지만 아직 너 같은 수재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니 집으로 돌아가 책을 많이 읽도록 해라. 훗날 전도가 유망할 터 성급하게 과거에 이름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격려했다.
한미한 출신 寒苦出身
선생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해 요흠공이 전당포에 가산을 팔아 빚이 산더미 같았다. 시험을 마치자 선생 등이 회안으로 돌아오고 수개월 뒤 요흠공이 강소번사격으로 강녕현승이 되어 부임하면서 부채에서 헤어나고자 했다. 선생을 집에 남겨 모친 범태부인을 도와 집안일을 다스리게 했다. 선생이 머리를 튼 뒤로 서숙 밖으로 나서지 않는 것에 만족하고 사회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아 전조를 거두는 관리를 처음 만났을 때는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듯 땀을 뻘뻘 흘렸다. 한참을 지나서야 익숙해졌는데, 이때야 선생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렸을 적 가정생활은 상술한 바와 같은데 형들이 모두 결혼해 가정을 이룬 뒤에는 집안의 지출도 많아져 생계는 더 어려워졌다. 세모 제석에는 범태부인이 서재로 와서 선생에게 말했다. “섣달그믐 제사는 거를 수 없는 예절인데 집안은 텅 비어 어떻게 한 해를 보낼까 모르겠다.” 서로 쳐다보며 눈물만 흘렸다. 선생은 이에 급히 뛰쳐나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고 새벽이 되어 비로서 돈 4천(즉 네 꾸러미)을 마련해 부지런히 새해를 맞았다.
선생은 집안을 돌보다 틈이 나면 게으름을 피지 않고 독서에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책을 살 돈이 없어 매번 벗들의 집에 가서 책을 빌려 가져다가 읽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끼고 오가는 경우가 습관이 되었다. 일찍이 시험을 보러 가다 진강鎭江에 들러 서점을 둘러보곤 광동에서 판각한(粵刻) 황청경해皇淸經解 1책을 보고 애지중지하여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해 여사로 돌아가 요흠공을 뵙고 말씀드리니 공이 전 30천(30천전으로 속칭 삼십관전으로 은 6량 정도에 해당한다.)을 내주며 사라하니 마치 보물을 얻은 듯 여겼다. 일찍이 선배들로부터 “책을 읽을 때는 한자도 남김 없이 읽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이에 1년의 노력으로 3년 분량을 독파했다. 관상수시觀象授時, 주인전疇人傳 등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부지런히 독파했다. 훗날 선생은 평생 얻은 지식과 독서 요령은 이때 다진 기초 덕분이라고 했다.
청유 등불 아래 첫 번째 저작 靑油燈下之第一部著作
17세 이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면서 책을 읽는 것도 어려워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빚쟁이들을 만나고 옷과 음식을 마련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해가 지고서야 비로소 책을 읽었다. 이때를 청유등靑油燈 시대라 한다. 선생은 매일 저녁 책을 읽고자 모아놨던 기름을 등잔에 채우고 남은 것은 다른 그릇에 담아놨다 필요하면 쓰곤 했는데, 잔과 그릇에 있던 기름을 다 써버리면 새벽닭 울음 소리가 세번 들리고 난 뒤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고증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경사를 익히고 남은 시간에 고비와 판본을 숙고하니 고증의 자료로 삼기 충분했다. 마침 산좌山左(산동성)의 상인 유금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매년 산좌, 중주中州(하남성) 및 관중關中(섬서성) 각지의 고비 판각본을 들고 다니며 장강(大江) 남북을 오가며 팔았다. 그가 회안에 들렸을 때 선생은 무척이나 갖고 싶었지만 빈한하여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교유를 맺고 대여료를 내고 빌려보았다. 비석이나 판본 한 장마다 전 40문을 내고 집으로 들고 와서 베끼고 연구했다. 한참 뒤 독비소전讀碑小箋 1권을 완성하고 또 잡기雜記와 소고小考를 엮어 존졸재찰소存拙齋扎疏 1권을 쓰니 이것이 저술 활동의 시작이었다.
광서14년 4월 선생의 나이 19세, 연평 범진지 선생의 딸을 베필로 맞으니 바로 첫 번째 배우자였던 범부인이다. 선생이 저술을 시작했으나 인쇄할 여력이 없자 범부인은 비녀와 귀걸이를 팔아 판각에 보탰다. 책이 완성되자 마침 강남의 명유 유곡원兪曲園(월樾) 태사太史가 이를 읽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책 안의 여러 대목을 꼽아 자신의 명저 차향실필기茶香室筆記에 수록하자 해내에 명성이 퍼지기 시작해 모두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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