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신강통신초新疆通信抄 (1) 본문
이하 "신강통신초"는 20세기 초 일본 니시혼간지의 문주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중앙아시아로 보낸 탐험대, 즉 오타니탐험대의 대원으로 2~3차 탐험을 주관, 참여했던 학승 다치바나 즈이초의 기록이다. 이하 1~2주 단위로 한 단락씩 연재해 보고자 한다.
신강통신초新疆通信抄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 1890~1968)
나는 제1회 몽골, 중앙아시아에서 과거 불교 융성 시대의 상황을 탐구하고 아울러 현재 남아있는 종교와 인심 등의 관계를 조사하라는 종단의 명을 받고 메이지41년 4월 고베 부두를 떠났다. 즉 제1회 탐험 여행은 내 나이 18세 봄에 시작되어 1년 반이 걸려 작년 카라코룸 산맥을 넘어 갠지스강 상류의 맑은 물을 말에게 먹이고 카슈미르의 아름다운(明媚)의 땅에서 플라타너스 나무에 노랗게 물들 때 그곳에서 예하[역자주: 니시혼간지 문주 오타니 고즈이]께 인사드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인도의 땅에서 석가세존의 영적을 참배하고 이집트로 건너가 나일강 상류에서 뱃놀이를 하기도하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영국에 잠시 살았다가, 또 소아시아에 당도해 산수 풍광을 감상하고, 오래된 흔적을 찾아다니고 오늘날 여러 도시의 상황을 목격하며 언뜻 보기와 다른 종교와 인심의 관계를 견문하고 중앙아시아 탐험으로 유명해진 명사를 찾아다녔다. 이렇게 유유히 행락하며 지난 날의 노고를 달랬던 것은 이어 제2회 탐험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8월 16일 밤 영국의 수도를 출발했다. 오랫동안 비서(中書)로서 예하를 수행해왔는데 기적 소리와 동시에 역을 떠나면서 다시 15개월간 이별하게 되었다. 당인(唐人)이 이르길 “그대는 소상으로 떠나고 나는 진으로 향한다네(君去瀟湘我向秦)[역자주: 정곡鄭谷의 시 회상여우인별淮上與友人別의 한구절이다.]”처럼. 예하의 귀국 해로도 고요하기를. 나는 여기서 이역의 산하로 몸소 떠난다. 가슴 속에 진정 만감이 교차한다.
자, 폴란드 국내를 지나 독부獨府에 도착해 러시아 수도에 머물길 수 일, 영국 수도에서 해로로 러시아 수도까지 조수 홉스가 내 큰 짐을 갖고 왔다. 모토노(本野) 대사 각하, 오치아이(落合) 참사관, 고마(小間) 서기관 등 여러분께서 만사에 다대한 힘을 써주신 데 감사를 표한다.
8월 31일 오후 8시 10분 러시아 수도를 출발했다. 뷔아츠카(ヴヰアツカ)를 경유하는 지방 열차로 옴스크로 향했다. 열차 안은 양초 하나로 사물을 분간해야 했다. 모포를 덮고 잠을 청하려 해도 장도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꿈속에서도 타클라마칸 사막, 천산, 곤륜산의 눈을 떠올리며 새벽을 맞았다.
이튿날 밤 이르티시 강을 운항하는 기선 아시아호에 몸을 실었다.
다음날 기선은 멀리 알타이산에서 발원해 북해로 나가는 이르티시 강을 따라 갔다. 강 양쪽의 광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강은 여러 섬을 품었다. 강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섬들에는 사리시네에(サリシネエ), 사리츠쿠스(サリツクス), 포플라스(ポフラス) 등의 수목이 무성하다. 진흙으로 된 낮은 비탈이 곳곳에 있고 수십 호의 농가가 하나의 마을을 이룬다. 하얀 벽에 푸른 첨탑을 가진 그리스정교 사원과 풍차 등을 보았다. 기선은 꽤 천천히 가는데다 자주 촌락에 정박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손님이 타고 내린면 오이, 우유, 빵 등을 파는 무리가 찾아온다. 그러나 배안에는 식당이 있고 피아노도 있다. 러시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인, 청인(淸人), 기르기스인 등이 섞여 있어 쾌적하다 할 수는 없다. 장강의 유람선이 떠오른다. 강 양쪽으로는 이른바 이르티시 유역으로 산 하나 볼 수 없는 평원으로 러시아인, 키르기스인이 경지에 소와 양을 몰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외로히 배 한 척만 운항한다.
9월 채 날이 밝기 전 배가 파블로다르(ボウロダル: 카자스흐탄)에 도착해 키타이호로 갈아탔다. 상류로는 아시아호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키타이호는 조금 작지만 식당과 피아노가 있다.
12일 8시 세미팔라틴스크(現 세메이: 카자흐스탄)에 도착했다. 나는 해가 뜨기 전부터 갑판 위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는데, 새벽빛이 아침 안개를 걷어내고 수목을 비추는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부두에서 러시아 리로 수리 떨어진 '호텔 러시아'에 투숙했다. 길에는 모래 먼지가 깊게 쌓여 광경이 황량하다. 회교와 그리스정교 사원, 그리고 약간의 양풍가옥을 제외하면 누추한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에불과하다. 그래도 은행이 있고 큰 상점이 없지 않다. 변경의 일대 도회지로서 부끄럽지 않다. 이틀간 머물며 큰 짐의 운송과 통역을 담당할 고용인을 들여 러시아 수도부터 데려왔던 소년 한 명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계속)
[참고]
모토노 대사: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郎, 1862~1918). 외교관, 정치가, 요미우리신문 창업자. 사가현 출신으로 러시아대사,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오치아이 참사관: 오치아이 겐타로(落合謙太郎, 1870~1926). 외교관. 시가현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외무성에 입사했다. 경성, 항주영사관, 러시아 대사관, 외무성 정부국, 프랑스 공사관에서 근무했다. 러시아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러일전쟁 개전을 추진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파리강화회의의 실무진으로서, 로잔 근동평회의와 로마 이민국제회의에서는 수석전권으로서 동시기 여러 국제회의에 일본대표로 참석했다. 이후 봉천총영사, 이탈리아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이탈리아에서 귀임 도중 선상에서 사망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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