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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비각: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3)

자불어 2021. 7. 3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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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 40주년 칭경 통문(1902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 끝내 열리지 못한 행사

 

즉위 40주년 기념식 10월 18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10월 4일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고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예원 경 서리(掌禮院卿署理) 이용선(李容善)이 아뢰기를, "왕위에 오른 40돌 경축 의식을 음력 계묘년(1903) 4월 4일로 날을 받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조금 더 자세하다.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이듬해 좋은 날로 잡아 거행하도록 조서를 내리심이 어떠하십니까. 장예원에 명하여 다시 날짜를 선정해 거행하겠다는 뜻을 전하겠사옵니다.  상주한 대로 하라. 

 

장예원경 서리, 장예원 소경 이용선이 상주합니다. 의정부 주본에 의거하여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다시 날자를 선정하여 거행하겠다는 상주를 받았습니다. 길일은 일관(日官) 김동표(金東杓)가 꼽아보니 계묘 4월 초4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이날로 정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상주합니다. 이날로 정하여 행하도록 하라. 

 

갑자기 날짜를, 그것도 해를 넘겨 연기하자는 상주도 뜻밖이며, 불과 며칠 전 야밤에 조서를 내려 군경의 머리까지 밀게 해 놓고 그리하라는 대황제 폐하의 윤허도 놀랍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잠시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던 한달 전으로 돌아가보자. 

 

서울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다른 것 없이 오직 9월(음력)에 있을 칭경행사로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각지의 진위대를 부르고 다시 신병을 모집하여 군을 편재하여 여단을 만들어 매일매일 연습한다. 칭경 시 관병식 및 공연무대를 설치하고 외국 사신들이 볼 수 있도록 꾸미고자 경운궁과 경희궁 사이에 무지개 다리를 놓는데 가히 100여 칸으로 13만원의 비용이 든다. 경희궁에서 관병식이 열리는 까닭이다. 원유회는 동궐 후원에서 열리는데, 수리에 들어갔다 한다. ...(중략)... 호열자병이 잠잠해졌다 확산되었다 하는데 서쪽 진남포부터 동쪽 부산까지 사망자가 자못 많다고 한다.(속음청사 하 권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에서 원문보고 번역)

 

위는 속음청사의 기록이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지방에 있는 진위대를 불러모으고, 여기에 부족해 신병을 새로 뽑기까지. 행사의 관병식을 위해 군대를 충원했다는 것은 고종의 군주로서의 자질을 잘 보여준다.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던 날, 끝무렵에는 다소 불길한 이야기가 보인다. 불법비디오가 없던 시절 위험하기가 으뜸이었다는 호열자(전염병)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럼 다시 행사를 연기했던 10월 4일 속음청사의 기록을 보자. 

 

지난달 초순부터 한강 변에서 처음 발생한 뒤로 성내까지 퍼져 죽는 이가 매우 많았다. 양의가 현미경으로 관찰해보고 이것은 호열자가 아니고 콜레라라고 했다. 감옥에 죄수들 수십명이 먼저 갑자기 죽자 성안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조칙을 내려 9월 칭경예식 계획을 중단하고 내년에 날을 잡아 거행하기로 하였다.(속음청사 하 권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에서 원문보고 번역)

*호열자를 보통 콜레라라고 했는데, 여기선 양자를 구분해 쓰고 있다. 이는 후일의 숙제로 남긴다.

 

고종의 욕심을 꺾은 것은 결국 전염병, 콜레라였다. 행사에 진심이었던 고종은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해를 넘겨 행사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도 결국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콜레라는 확산세를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황태자마저 콜레라에 걸렸다. (나중엔 회복했지만) 

 

4. 광화문 비각에서 고종을 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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