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요사) 요나라의 명장, 발해인 고모한 본문
고려거란전쟁으로 관심이 높아진 요나라. 신라와 당의 거센 공격으로 동북의 패자였던 고구려가 사라지자 거란은 그 자리를 대신해 이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거란은 몽골초원 동쪽의 주요 세력으로, 한동안은 당과 돌궐 사이에서 힘의 지렛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까닭에, 우리 역사에서 만주를 도려냈다는 점 때문인지 싫어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러나 오늘날 국적이나 경계를 구분으로 근대 내셔널리즘을 투영하는 건 의미도 없을뿐더러 온당하지도 한다. 삼국이 소멸할 때 그랬듯, 사람들은 이합집산하며 새로운 사회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소개할 발해 출신 요나라 장수 고모한高模翰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고모한高模翰은 일명 송松으로 발해인渤海人이다. 근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을 잘 쐈으며 병법 이야기를 즐겼다. 태조가 발해를 막 평정했을 때 모한은 고려 땅으로 달아났고 고려 왕이 딸을 주어 혼인시켰다. 그러나 죄를 지어 달아나 귀순했으나 술에 취해 사람을 죽인 죄에 연루되어 하옥되었다. 태조가 그의 재능을 알고 용서해 주었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인이 대규모로 고려로 귀부 했다. 고려사 세가 태조8년 기사에 “12월 무자 발해渤海의 좌수위소장左首衛小將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000호를 거느리고 귀부歸附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고모한과 동일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왕건이 망명한 발해인에게 딸을 주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고모한이 요로 귀순하며 지위를 얻고자 꾸며낸 말일 수 있다.
천현天顯11년(936) 7월 당이 장경달張敬達・양강원楊光遠을 보내 군사 50만을 이끌고 태원太原을 공격했는데, 그 기세가 매우 거셌다. 석경당石敬瑭이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태종太宗이 이를 허락했다. 9월 병사를 징발해 안문雁門으로 나가자 모한이 경달의 군대와 접전을 펼쳐 격파했다. 태원의 포위가 풀리자 경당이 밤에 나와 황제를 알현하고 부자의 약조를 맺었다. 황제가 모한을 불러 술과 찬을 하사하고 친히 사졸과 연회를 가지니 군대의 사기가 더욱 진작되었다. 다음날 다시 싸워 또 격파하자 경달이 진안晉安의 진영(寨)으로 달아났다. 모한이 붙잡은 포로를 황제에게 바쳤다.(헌부례獻俘禮를 했다.) 마침 석경당이 진의 황제로 자립하자 광원이 결달을 죽이고 항복하니 여러 주가 모두 항복했다. 황제가 모한에게 “짐이 군대를 일으켜 백여 번을 싸웠건만 경의 군공이 제일이오. 비록 옛 명장이라 해도 더 할 수는 없을 거요.”라며 칭찬했다. 그리고 상장군上將軍을 내려주었다. 회동會同원년(938),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의) 즉위식을 마치고(冊禮告成) 백관과 외국 사신을 모아 이의전二儀殿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황제가 모한을 가리켜 말했다. “그는 나라의 용맹스러운 장수다. 짐이 천하를 통일한 것은 이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군신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진이 맹세를 배반해 군대를 보내 남쪽을 정벌했다. 모한이 통군별사統軍副使가 되어 승알僧遏과 함께 선봉이 되어 적성을 빼앗고 덕德・패貝의 여러 진영(寨)을 빼앗았다. 이해 겨울 총좌우철요자군總左右鐵鷂子軍을 겸해 관남關南의 성읍 수십 개를 함락했다. 3월 칙호관勑虎官 양담楊覃이 건녕군乾寧軍에 부임해 창주절도사滄州節度使 전무명田武名에게 포위당했다. 모한과 조연수趙延壽가 나가 구원할 방도를 논의하는데 잠시 뒤 빛이 모한의 눈에서 나오더니 깃대를 감돌고 유성과 같이 오랫동안 타올랐다. 모한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하늘도 동조한다는 좋은 징조요!” 이렇게 출병해 죽이고 붙잡은 적이 매우 많았다. 그 공로로 시중을 더했다. 염산鹽山일대를 공격하고 요안饒安을 격파해 진나라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어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부太傅를 더했다.
진이 위부절도사魏府節度使 두중위杜重威가 군사 30만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모한이 좌우에 말했다. “군법은 바름에 있는 것이지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수로 소수를 침범해도 의롭지 못하면 반드시 패배하니 바로 진을 가리키는 것이다!” 꾸짖는 말을 멈추자마자 휘하 300명을 이끌고 맞받아쳐 싸워 그 선봉 양한장梁漢璋을 죽이자 남은 병사들이 달아났다. 황제가 손수 조서를 내려 아름다움을 표창하고 한나라의 이릉李陵에 비견했다. 얼마 뒤 두중위杜重威等 등이 다시 호타하滹沱河를 건너자 황제가 모한을 불러 계책을 논의했다. 황제가 그의 말에 기뻐하며 “장수 중에 따라올 이가 없소”라고 말하고 모한에게 중도교中渡橋를 지키게 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다시 격파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위에서 양군의 군대를 살펴보았는데 경의 예봉은 대적할 자가 없어 마치 매가 꿩이나 토끼 쫓듯 하더이다. 응당 인각麟閣에 초상화를 걸고 관작이 후손까지 이어지게 해주겠소.” 두중위杜重威 등이 항복하자 황제의 거가車駕가 변주汴州로 들어갔다. 특진검교대사特進檢校太師를 더하고 철군개국공悊郡開國公에 봉하고 새서璽書와 칼 등 기물을 하사했다. 劍器. 변주순검사汴州巡檢使가 되어 사수汜水 여러 산의 적도들을 평정하고 중경中京으로 진을 옮겼다.
천록天祿2년(948),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고 대의對衣・안륵鞍勒・명마名馬를 하사했다. 응력應曆 초 불러다가 중대성우상中臺省右相에 임명했다. 동경東京에 도착하자 부로父老가 환영하며 말했다. “공이 군대에 투신하여 전장을 누비며 고귀한 자리에 올랐으니 (이는) 고을의 영예로 상여相如・매신買臣의 무리도 더 낫진 못합니다.” 9월 정월 좌상左相으로 승진하고 사망했다.
高模翰, 一名松, 渤海人. 有膂力, 善騎射, 好談兵. 初, 太祖平渤海, 模翰避地高麗, 王妻以女. 因罪亡歸. 坐使酒殺人下獄, 太祖知其才, 貰之.
天顯十一年七月, 唐遣張敬達・楊光遠帥師五十萬攻太原, 勢銳甚. 石敬瑭遣人求救, 太宗許之. 九月, 徵兵出雁門, 模翰與敬達軍接戰, 敗之, 太原圍解. 敬瑭夜出謁帝, 約爲父子. 帝召模翰等賜以酒饌, 親饗士卒, 士氣益振. 翌日, 復戰, 又敗之. 敬達鼠竄晉安寨, 模翰獻俘于帝. 會敬瑭自立爲晉帝, 光遠斬敬達以降, 諸州悉下. 上諭模翰曰, "朕自起兵, 百餘戰, 卿功第一, 雖古名將無以加." 乃授上將軍. 會同元年, 冊禮告成, 宴百官及諸國使于二儀殿. 帝指模翰曰, "此國之勇將, 朕統一天下, 斯人之力也." 羣臣皆稱萬歲.
及晉叛盟, 出師南伐. 模翰爲統軍副使, 與僧遏前驅, 拔赤城, 破德・貝諸寨. 是冬, 兼總左右鐵鷂子軍, 下關南城邑數十. 三月, 勑虎官楊覃赴乾寧軍, 爲滄州節度使田武名所圍, 模翰與趙延壽聚議往救. 俄有光自模翰目中出, 縈繞旗矛, 焰焰如流星久之. 模翰喜曰, "此天贊之祥!" 遂進兵, 殺獲甚眾. 以功加侍中. 略地鹽山, 破饒安, 晉人震怖, 不敢接戰. 加太傅.
晉以魏府節度使杜重威領兵三十萬來拒, 模翰謂左右曰, "軍法在正不在多. 以多陵少, 不義必敗. 其晉之謂乎!" 詰旦, 以麾下三百人逆戰, 殺其先鋒梁漢璋, 餘兵敗走. 手詔褒美, 比漢之李陵. 頃之, 杜重威等復至滹沱河, 帝召模翰問計. 上善其言曰, "諸將莫及此." 乃令模翰守中渡橋. 及戰, 復敗之, 上曰, "朕憑高觀兩軍之勢, 顧卿英銳無敵, 如鷹逐雉兔. 當圖形麟閣, 爵貤後裔." 已而杜重威等降. 車駕入汴, 加特進檢校太師, 封悊郡開國公, 賜璽書・劍器. 爲汴州巡檢使, 平汜水諸山土賊, 遷鎮中京.
天祿二年, 加開府儀同三司, 賜對衣・鞍勒・名馬. 應曆初, 召爲中臺省右相. 至東京, 父老歡迎曰, "公起戎行, 致身富貴, 爲鄉里榮, 相如・買臣輩不足過也." 九年正月, 遷左相, 卒.
[遼史 卷76 高模翰, pp.1249~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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