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구당서) 고구려의 적, 설인귀薛仁貴(후편) 본문

오늘의 고전

(구당서) 고구려의 적, 설인귀薛仁貴(후편)

자불어 2024. 1. 20. 14:55
728x90
 

(구당서) 고구려의 적, 설인귀薛仁貴(전편)

이하는 구당서 설인귀 열전을 번역한 것이다.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까지 올라갔다. 고구려 침공 시 선봉에서 섰으며, 신라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요동 지역 뿐

alsdaskind.tistory.com

(앞에서 계속)

얼마 후 다시 병사를 이끌고 천산天山에서 구성돌궐九姓突厥을 공격했다. 출발에 임하여 고종이 안에서 갑옷을 꺼내 인귀를 시험했다. 주상이 말했다. “옛날에 활을 잘쏘는 이들은 일곱 겹의 갑옷을 꿰뚫는다 했는데, 경은 다섯 번을 쏘시오.” 인귀가 쏘아 뚫자 고종이 깜짝 놀라 다시 견갑堅甲을 내어 주었다. 이때 구성은 무리가 10여 만이었는데, 싸납고 건장한 이들 수십명이 역으로 와서 도전했다. 인귀가 화살 세 발을 쏘아 세 명을 죽이자 나머지가 일순간에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인귀가 후환이 될까 두려워 모두 묻어 죽였다. 다시 적북磧北으로 가 남은 무리를 안무하고 위엽호僞葉護 3인을 잡아 돌아왔다. 군중에서 노래 부르길, “장군이 화살 세 발로 천산을 평정하자 장사의 긴 노래 소리 한관으로 들어온다.” 구성이 이때부터 쇠약해져 더는 변방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尋又領兵擊九姓突厥於天山, 將行, 高宗內出甲, 令仁貴試之. 上曰: 「古之善射有穿七札者, 卿且射五重. 」仁貴射而洞之, 高宗大驚, 更取堅甲以賜之. 時九姓有衆十餘萬, 令驍健數十人逆來挑戰, 仁貴發三矢, 射殺三人, 自餘一時下馬請降. 仁貴恐爲後患, 並坑殺之. 更就磧北安撫餘衆, 擒其僞葉護兄弟三人而還. 軍中歌曰: 「將軍三箭定天山, 戰士長歌入漢關. 」九姓自此衰弱, 不復更爲邊患.

건봉乾封(666~668) 초 고려의 대장 천남생泉男生이 무리를 이끌고 내부하자 고종이 장군 방동선龐同善, 고간高侃 등을 보내 영접하게 했다. 남생男生의 동생 남건男建이 국인을 이끌고 동선 등을 역습하자 인귀에게 조서를 내려 병사를 통솔하여 뒤를 돕게 했다. 동선 등이 신성新城이 도착해 밤에 적들의 습격을 받자 인궤가 특공대[효용驍勇]를 이끌고 구원하여 머리 수백 급을 베었다. 동선 등이 금산金山까지 나갔다가 적들에게 패하자 고려가 승기를 잡고 진격했다. 인귀가 측면을 공격하자 적의 무리가 크게 패했고 5만여 급을 목베고 결국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巖 세 성을 빼앗고 비로소 남생과 만났다. 고종이 손수 칙서를 써서 노고를 치하했다. “금산의 대치에서 흉악한 무리들은 실로 번성했소. 경이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좌를 치고 우를 때리며 가는 곳 마다 길을 텄기에 다른 군대도 용기를 내어 이런 대승을 거둘 수 있었소. 훌륭하게 공적을 세웠으니 영예는 모두 (그대의 것)이오.” 인귀가 승기를 잡아 2천인을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했다. 여러 장수들이 병력이 적다 했으나 인귀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병력을 잘 쓰는 것이지 많은 데 있는 게 아니오.” 그리고 선봉으로 나아갔다. 적의 무리가 달려와 막았으나 역공으로 대파하고 만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결국 부여성을 빼앗았다. 이 바람에 부여천扶餘川의 40여 성이 공포에 휩싸여 한꺼번에 투항했다. 인귀가 바로 바다를 따라 땅을 빼앗았고 이적李勣의 군대와 평양성平壤城에서 합류했다. 고려가 항복하자 인귀에게 조서를 내려 2만인을 거느리고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평양에 남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衞大將軍을 제수하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했으며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를 겸하게 했다. 신성新城으로 치소를 옮겨 고아와 노인을 보살피고 재목으로 능력이 있는자는 재주에 따라 하급관리로 임용하고 충효하고 절의가 있는 자는 모두 정표를 더해주자 고려의 관리와 백성[士衆] 누구 하나 당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이 않는 이가 없었다.

乾封初, 高麗大將泉男生率衆內附, 高宗遣將軍龐同善・高侃等迎接之, 男生弟男建率國人逆擊同善等, 詔仁貴統兵爲後援. 同善等至新城, 夜爲賊所襲. 仁貴領驍勇赴救, 斬首數百級. 同善等又進至金山, 爲賊所敗, 高麗乘勝而進. 仁貴橫擊之, 賊衆大敗, 斬首五萬餘級, 遂拔其南蘇・木底・蒼巖等三城, 始與男生相會. 高宗手敕勞之曰: “金山大陣, 凶黨實繁. 卿身先士卒, 奮不顧命, 左衝右擊, 所向無前, 諸軍賈勇, 致斯克捷. 宜善建功業, 全此令名也.” 仁貴乘勝領二千人進攻扶餘城, 諸將咸言兵少, 仁貴曰: “在主將善用耳, 不在多也.” 遂先鋒而行, 賊衆來拒, 逆擊大破之, 殺獲萬餘人, 遂拔扶餘城. 扶餘川四十餘城, 乘風震慴, 一時送款. 仁貴便並海略地, 與李勣大會軍于平壤城. 高麗既降, 詔仁貴率兵二萬人與劉仁軌於平壤留守, 仍授右威衞大將軍, 封平陽郡公, 兼檢校安東都護. 移理新城, 撫恤孤老, 有幹能者, 隨才任使, 忠孝節義, 咸加旌表, 高麗士衆莫不欣然慕化.

함형咸亨원년(670) 토번吐蕃이 쳐들어와 노략질하자 다시 인귀가 나사도행군대총관邏娑道行軍大總管이 되어 장군 아사나보진阿史那道眞, 곽대봉郭待封 등을 이끌고 공격했다. 대봉이 일찍이 선성진수로 있었는데, 인귀의 부하게 된 것을 수치로 여겨 여러 차례 지휘[절도]를 어겼다. 군이 대비천大非川에 당도하여 막 오해烏海로 출발하려 하는데 인귀가 대봉에게 말했다. “오해는 (지형이) 험하고 (거리도) 먼데다 수레를 이동시키기도 어려운 까닭에 만일 치중輜重을 끌고 갔다가는 기회를 잃을 수 있는데다 적을 격파하고 돌아온다 해도 이동에 번거롭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장기瘴氣도 심해 오래 머무를 수도 없소. (그러니) 대비령 위에 목책을 설치하면 (공격 받아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니 2만 명은 그곳에서 머물러 양쪽에 목책을 쌓고 치중 등을 그 안에 모아둔 뒤, 우리가 경무장한 정병을 이끌고 지름길로 나가 준비하지 못했을 때 기습하면 그들을 박멸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는 인귀가 먼저 출발하여 하구에 도착해서 조우한 적을 격파하여 대부분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그들이 키우던 소와 양 만여 마리를 빼앗아 오해성으로 돌아와 후발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봉은 인귀의 명령을 어기고 치중을 계속 전진시켰고 오해에 거의 도착하자 구원하러 온 토번 20여 만 무리에게 요격당해 추산趨山으로 달아났고 군량과 치중도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 인귀가 결국 대비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물렸다. 토번이 다시 무리 40여 만을 더해 반격하자 관군이 대패했고 인귀는 끝내 토번의 대장 논흠릉論欽陵과 화햑을 맺었다. 인귀가 한탄하며 말했다. “올해가 경오년인데 군이 세월을 돌려놓았으니 등애鄧艾가 촉蜀에서 죽은 이유이자 내가 패배한 이유를 알겠다.” 인귀가 이일로 제명되었다.

咸亨元年, 吐蕃入寇, 又以仁貴爲邏娑道行軍大總管, 率將軍阿史那道眞・郭待封等以擊之. 待封嘗爲鄯城鎮守, 恥在仁貴之下, 多違節度. 軍至大非川, 將發赴烏海, 仁貴謂待封曰: “烏海險遠, 車行艱澀, 若引輜重, 將失事機, 破賊即迴, 又煩轉運. 彼多瘴氣, 無宜久留. 大非嶺上足堪置柵, 可留二萬人作兩柵, 輜重等並留柵內. 吾等輕銳倍道, 掩其未整, 即撲滅之矣.” 仁貴遂率先行至河口, 遇賊擊破之, 斬獲略盡, 收其牛羊萬餘頭, 迴至烏海城, 以待後援. 待封遂不從仁貴之命, 領輜重繼進. 比至烏海, 吐蕃二十餘萬悉衆來救, 邀擊, 待封敗走趨山, 軍糧及輜重並爲賊所掠. 仁貴遂退軍屯於大非川. 吐蕃又益衆四十餘萬來拒戰, 官軍大敗, 仁貴遂與吐蕃大將論欽陵約和. 仁貴歎曰: “今年歲在庚午, 軍行逆歲, 鄧艾所以死於蜀, 吾知所以敗也.” 仁貴坐除名.

얼마 후 고려의 무리가 연이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인귀를 계림도총관雞林道總管에 임명해 경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상원上元 중 일에 연루되어 상주象州로 유배갔다가 용서를 받아 돌아왔다. 고종이 그 공을 생각해 개요開耀원년(681) 다시 불러들여 말해다. “왕년 구성궁九成宮에 물이 들이찼을 때 경이 없었다면 고기(밥)이 되었을 거요. 경이 또 북으로는 구성九姓(돌궐)을 정벌하고 동으로는 고려를 격파했으니 막북漠北과 요동遼東이 모두 성교聖敎를 받들게 된 것은 모두 경 덕분이오. 경이 비록 허물이 있다 하나 어찌 그것을 잊겠소. 어떤 자가 경이 오해성에서 직접 적과 싸우지 않아 기회를 놓쳤다 하길래 짐이 못마땅했던 것은 이 하나 뿐이오. 지금 서쪽 변경이 시끄러워 과주瓜州와 사주沙州로 가는 길이 모두 막혔으니 어찌 경을 향읍에 누워있게 두겠소. 짐을 위해 (군대를) 지휘해주지 않겠소?” 이에 과주장사瓜州長史를 받고 얼마 뒤 우령군위장군右領軍衞將軍 검교대주도독檢校代州都督에 제수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운주에서 돌궐 원진 등을 공격해 만여 급을 참수하고 포로 2만 명을 붙잡았으며 낙타, 소와 양 3만 여 마리를 얻었다. 인귀가 다시 장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그 이름만 듣고도 놀라 모두 혼비백산하니 누구도 대적할 자 없었다. 그해 인귀가 병을 죽으니 향년 70세였다. 좌효위장군左驍衞將軍에 추증하고 관에서 상여를 제작해주었으며 아울러 가족 모두에게 역마를 지급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아들 설눌薛訥은 전이 따로 있다. (끝)

尋而高麗衆相率復叛, 詔起仁貴爲雞林道總管以經略之. 上元中, 坐事徙象州, 會赦歸. 高宗思其功, 開耀元年, 復召見, 謂曰: “往九成宮遭水, 無卿已爲魚矣. 卿又北伐九姓, 東擊高麗, 漠北・遼東咸遵聲教者, 並卿之力也. 卿雖有過, 豈可相忘. 有人云卿烏海城下自不擊賊, 致使失利, 朕所恨者, 唯此事耳. 今西邊不靜, 瓜・沙路絕, 卿豈可高枕鄉邑, 不爲朕指揮耶?” 於是起授瓜州長史, 尋拜右領軍衞將軍, 檢校代州都督. 又率兵擊突厥元珍等於雲州, 斬首萬餘級, 獲生口二萬餘人・駝馬牛羊三萬餘頭. 賊聞仁貴復起爲將, 素憚其名, 皆奔散, 不敢當之. 其年, 仁貴病卒, 年七十, 贈左驍衞將軍, 官造靈輿, 并家口給傳還鄉. 子訥, 別有傳.

 
딱지본 소설 설인귀전 / 전주역사박물관 소장

  舊唐書 卷83 薛仁貴, pp.2781~2783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