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삼국지) 유비의 두 번째 황후, 목황후穆皇后 본문
선주先主(유비) 목황후穆皇后는 진류인陳留人이다. 오빠 오일吳壹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일의 부친은 본디 유언劉焉과 친구였던 까닭에 언을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언이 다른 뜻을 두고 있던 차에 [한진춘추漢晉春秋: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자 오吳가 손부인孫夫人을 불러들였다. (이때) 부인은 오로 태자太子를 데려가려 했다. 제갈량諸葛亮이 조운趙雲을 시켜 병력을 배치해 강을 막아 태자가 가지 못하게(남아 있게) 하여 제지할 수 있었다.] 관상 잘 보는 이가 태후의 상을 보더니 고귀해 질 것이라 했다. 언이 이때 아들 모瑁에게 들어오라 하여 모의 부인으로 들였다. 모가 죽자 황후는 홀로 지냈다. 선주가 익주益州를 평정하자 손부인孫夫人이 오吳로 돌아갔고 여러 군신들이 선주에게 황후를 맞을 것을 권했다. 선주가 유모劉瑁와 동족이라 꺼려했으나 법정法正이 진언했다. “친소로 따지자면 어찌 진문공晉文公과 자어子圉에 비하겠습니까?” [습착치習鑿齒: 부부의 혼인은 인류의 시작이자 왕화의 기본으로 필부조차 예를 따르거늘 하물며 군주로서야. 진문공晉文公은 예를 어기고 위력으로 공업을 이루어기에 자범子犯은 “타인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먼저 따라야 할 것인데 그 나라를 빼앗으면서 어찌 그 처를 취하겠는가. 이는 까닭 없이 예교禮敎를 어긴 것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지금 선주는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이 비유는) 과거의 잘못을 답습한 것으로 요순堯舜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니다. 선주가 이를 따른 것은 잘못이다.] 이에 부인을 맞이했다. 건안建安24년(219) 한중왕후가 되었다. 장무章武원년(221) 여름 5월 책策을 내렸다. “짐이 천명天命을 받아 지존至尊을 받들고 만국萬國에 임한다. 이제 후를 황후로 하고 사지절使持節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을 보내 새수璽綬를 수여하니 종묘를 잇고 천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이니 황후는 받들라.” 건흥建興원년 5월 후주後主가 즉위하자 후를 황태후皇太后로 높이고 ‘장락궁長樂宮’이라 칭했다. (오빠) 오일은 관직이 거기장군車騎將軍까지 올라갔고 현후縣侯에 봉해졌다. 연희延熙8년 후가 서거[薨]하니 혜릉惠陵에 합장했다. [손성孫盛의 촉세보蜀世譜: 일壹의 손자 교喬는 이웅李雄 재위 30년(李雄中三十年)에 죽었는데 웅에게 굴하지 않았다.]
先主穆皇后, 陳留人也. 兄吳壹, 少孤, 壹父素與劉焉有舊, 是以舉家隨焉入蜀. 焉有異志, 而聞善相者相后當大貴. 焉時將子瑁自隨, 遂爲瑁納后. 瑁死, 后寡居. 先主既定益州, 而孫夫人還吳, 羣下勸先主聘后, 先主疑與瑁同族, 法正進曰: “論其親疎, 何與晉文之於子圉乎?” 於是納后爲夫人. 建安二十四年, 立爲漢中王后. 章武元年夏五月, 策曰: “朕承天命, 奉至尊, 臨萬國. 今以后爲皇后, 遣使持節丞相亮授璽綬, 承宗廟, 母天下, 皇后其敬之哉!” 建興元年五月, 後主即位, 尊后爲皇太后, 稱長樂宮. 壹官至車騎將軍, 封縣侯. 延熙八年, 后薨, 合葬惠陵
三國志 卷34 二主妃子傳(先主穆后), p.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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