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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손권의 대신, 주연朱然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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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손권의 대신, 주연朱然

자불어 2024. 1. 3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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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의 대신 주연의 무덤이 1984년 중국 안휘성 마안산시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에서는 그의 이름이 적힌 목찰이 발견되었다. [사진 참조] 목제로 총 3건으로 장방형이다. 모두 크기가 동일하며 명문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정면 꼭대기 끝 중앙에 묵서로 “謁(알)”이라고 쓰고 오른쪽 아래 한 줄로 “[ ]節右軍師左大司馬當陽侯丹陽朱然再拜([ ] 절우군사좌대사 마당양후단양주연재배)”라고 썼다. 자체는 예서와 해서 중간 정도다. 여기에 나오는 주연의 관작은 삼국지 열전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하 그의 열전을 번역, 소개한다.

주연 목찰


출전: 三國志 吳書 卷56 朱然傳 子績, pp.1305~1309.

주연朱然은 자가 의봉義封, 주치朱治 누이의 아들로 본래 성은 시씨施氏다. 처음에 처에게 아이가 없어 연이 13세에 손책孫策에게 계啓를 올려 후사로 삼겠다 청했다. 책이 단양군에 명하여 양주로 연을 부르자 연이 오로 왔고 책이 중히 예로 맞이했다.(朱然, 字義封, 治姊子也, 本姓施氏. 初治未有子, 然年十三, 乃啟策乞以爲嗣. 策命丹楊郡以羊酒召然, 然到吳, 策優以禮賀.)

주연은 일찍이 손권과 동문수학하며 깊은 관계를 맺어 권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연을 여요장餘姚長[여요현장]에 임명했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뒤에 산음령山陰令 [산음현령]이 뒤고 절충교위折衝校尉를 더해 5개 현을 독찰했다. 손권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단양丹楊을 나누어 임천군臨川郡을 설치하고 연을 태수太守로 임명하여 군사 2천 명을 내려주었다. 마침 산적이 횡행하자 연이 토벌에 착수해 10달 만에 평정했다. 조공曹公이 유수濡須로 출전하자 주연이 대오大塢와 삼관三關에 주둔하여 준비하자 편장군偏將軍에 배수했다. 건안建安24년(219) 관우關羽 토벌을 따라나서 따로 반장潘璋과 함께 임저臨沮에서 관우를 사로잡아 소무장군昭武將軍이 되고 서안향후西安鄉侯에 봉해졌다.(然嘗與權同學書, 結恩愛. 至權統事, 以然爲餘姚長, 時年十九. 後遷山陰令, 加折衝校尉, 督五縣. 權奇其能, 分丹楊爲臨川郡, 然爲太守, 授兵二千人. 會山賊盛起, 然平討, 旬月而定. 曹公出濡須, 然備大塢及三關屯, 拜偏將軍. 建安二十四年, 從討關羽, 別與潘璋到臨沮禽羽, 遷昭武將軍, 封西安鄉侯.)

호위장군虎威將軍 여몽呂蒙의 병이 위독해지자 권이 (여몽에게) 물었다. “경이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대를 이을 수 있겠소?” 여몽이 답했다. “주연이 충분히 용감하고 성실하니 삼가 쓸만하다 하겠습니다.” 여몽이 죽자 손권이 임시로[假] 연에게 절節을 내려 강릉江陵에 진수하게 했다. 황무黃武원년(222) 유비劉備가 거병하여 의도를 공격하자 연이 5천 명을 이끌고 육손陸遜과 힘을 합쳐 비를 막았다. 주연이 (군사를) 나누어 유비의 전봉을 공격하고 퇴로를 끊자 결국 유비는 패주 했다. 정북장군征北將軍에 배수하고 영안후永安侯로 봉했다.(虎威將軍呂蒙病篤, 權問曰: “卿如不起, 誰可代者?” 蒙對曰: “朱然膽守有餘, 愚以爲可任.” 蒙卒, 權假然節, 鎮江陵. 黃武元年, 劉備舉兵攻宜都, 然督五千人與陸遜并力拒備. 然別攻破備前鋒, 斷其後道, 備遂破走. 拜征北將軍, 封永安侯.)

위가 조진曹眞・하후상夏侯尙・장합張郃 등을 보내 강릉江陵을 공격하고 위 문제文帝가 직접 완宛에 주둔하여 그 기세를 뒷받침하고 겹겹이 주둔해 성을 포위했다. 손권이 장군 손성孫盛을 보내 10,000명을 이끌고 주 위쪽에서 대비케 하여 요새[塢]를 둘러싸게 하고 주연에게 밖에서 구원하게 했다. 장합이 병사들을 건너게 하여 손성을 공격하자 손성은 버텨낼 수 없어서 즉시 퇴각했다. 장합은 주 위쪽에 근거를 두고 감싸고 방어하자 주연이 안팎을 끊었다. 손권이 반장潘璋, 양찬楊粲 등을 보내 포위를 풀고자 했으나 풀 수 없었다. 이때 주연은 성안 병력 다수가 부종에 걸려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자가 거의 5천 인에 불과했다. 조진 등이 토산에 올라가 땅을 다지고 망루를 세워 성과 마주하여 궁시를 비처럼 쏟아 붙자 장사들 모두 실색하였으나 연은 편안한 모습에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관리와 군사를 독려하여 빈틈을 타 양 주둔지를 공격해 파괴했다. 위가 포위 공격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으나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강릉령江陵令 요태姚泰가 군사를 이끌고 성 북문을 방비했는데, 밖으로는 병사가 많은 듯 보여도 성 안에는 사람이 적었고 곡식도 다 떨어져 가자 적과 내통했다. 안에서 내응 하기로 하고 막 일어나려던 찰나에 일이 발각되었다. 주연이 태를 죽였다. 하후상 등은 이길 수 없자 공격을 그만두고 회군했다. 이로써 주연의 명성이 적국에 널리 알려졌고 당양후當陽侯로 개봉되었다.(魏遣曹眞・夏侯尙・張郃等攻江陵, 魏文帝自住宛, 爲其勢援, 連屯圍城. 權遣將軍孫盛督萬人備州上, 立圍塢, 爲然外救. 郃渡兵攻盛, 盛不能拒, 即時卻退, 郃據州上圍守, 然中外斷絕. 權遣潘璋・楊粲等解〔圍〕而圍不解. 時然城中兵多腫病, 堪戰者裁五千人. 眞等起土山, 鑿地道, 立樓櫓, 臨城弓矢雨注, 將士皆失色, 然晏如而無恐意, 方厲吏士, 伺閒隙攻破兩屯. 魏攻圍然凡六月日, 未退. 江陵令姚泰領兵備城北門, 見外兵盛, 城中人少, 穀食欲盡, 因與敵交通, 謀爲內應. 垂發, 事覺, 然治戮泰. 尙等不能克, 乃徹攻退還. 由是然名震於敵國, 改封當陽侯.)

(황무)6년(227) 손권이 직접 무리를 거느리고 석양石陽을 공격하고 회군하려 하는데, 반장潘璋이 뒤를 끊었다. 밤에 혼란스럽게 나가자 적들이 반장을 뒤 따라잡아 공격했지만 반장은 금할 수 없었다. 주연이 (군대를 돌려) 멈춰서 적을 막아 앞선 배들이 멀리 벗어날 수 있도록 하고 천천히 뒤에서 출발했다. 황룡黃龍원년(229) 거기장군車騎將軍・우호군右護軍 영연주목領兗州牧에 배수되었다. 얼마 뒤 연주兗州를 촉에 나누어주면서 목牧에서 해직되었다.(六年, 權自率眾攻石陽, 及至旋師, 潘璋斷後. 夜出錯亂, 敵追擊璋, 璋不能禁. 然即還住拒敵, 使前船得引極遠, 徐乃後發. 黃龍元年, 拜車騎將軍・右護軍, 領兗州牧. 頃之, 以兗州在蜀分, 解牧職.)

가화3년(234) 손권이 촉과 함께 기한을 정해 군사를 일으켰다. 손권이 직접 신성으로 향하고 주연과 전종에게 각기 부절을 내려 좌우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관리와 군사가 질병에 걸리는 바람에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嘉禾三年, 權與蜀克期大舉, 權自向新城, 然與全琮各受斧鉞, 爲左右督. 會吏士疾病, 故未攻而退.)

적오赤烏5년(242) 조중柤中을 정벌하는데, 위나라 장수 포충蒲忠과 호질胡質이 각기 수천 인을 거느리고 충이 험준한 지역을 가로막아 주연 (군대)의 뒤를 차단하려 했고 질은 충을 뒤따라 후원했다. 이때 연 휘하의 병력이 앞서 4차례에 걸쳐 출진했으나 소식을 듣고 바로 수습해 바로 진영에 있는 병사 800인으로 역습하자 포충이 불리해졌고 호질 등이 모두 물러났다. (적오) 9년 다시 조중을 정벌하자 위나라 장수 이흥李興은 주연이 깊숙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보병과 기병[步騎] 6천을 이끌고 연의 뒤를 끊었으나 연이 밤에 나가 역습하여 군이 승기를 되찾았다. 앞서 귀의歸義 마무馬茂가 역심을 품다 발각되어 주살되어 손권이 매우 분노했다. 주연이 손권을 만나 상소를 올렸다. “마무, 이 자식은 감히 키워준 은혜를 배반했습니다. 신이 이제 천자 위엄을 받들어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면 붙잡아 온 것들에게 명령하여 안팎으로 화려함을 펼치려 하오니 이제 배가 강을 메우면 가히 볼만할 터, 이로써 상하의 원망이 풀어질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먼저 신하들에게 칭찬을 말씀해 주시고 나중에 신하들에게 벌을 시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손권은 표를 물리치고 나오지 않았다. 주연이 승리를 바치고 군신이 축하를 올리자 손권이 술을 들고 즐거워하며 주연이 올린 표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가 앞서 처음 표를 올렸을 때 나는 무척 어렵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제 과연 그 말대로 되니 통찰력이 있다 하겠다.” 사신을 보내 주연을 좌대사마左大司馬・우군사右軍師에 배수했다. 주연은 키가 7척이 못되었으나 성격이 분명하고 안으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글솜씨는 오직 군영 안에서 시행하며 나머지 다른 것은 소박했다. 종일 바른 모습으로 상시 전장에 있으며 긴급한 일에 임하며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감이 따라올 자 없었다. 비록 평화로운 시기에도 조석으로 북소리 울리면 군영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군장을 갖추어 대오를 이루게 하니 이로써 적과 쉽게 대적하고 저절로 준비하게끔 하여 출전할 때마다 공을 세웠다. 제갈근諸葛瑾의 아들 융融과 보즐步騭의 아들 협協은 각기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손권은 특별히 다시 연에게 대독大督을 총괄하게 했다. 또 육손陸遜마저 죽자 공신명장 가운데 남은 이는 오직 주연뿐으로 이보다 더 두터운 자는 없었다. 병석에 누운 지 2년, 차츰 위독해지자 손권이 낮에는 식사를 줄이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약과 음식을 보내는 사신이 길 위에서 서로 마주칠 정도였다. 주연이 사신 편에 표를 올려 병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 하면 손권이 그때마다 불러들여 직접 안부를 묻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포백을 들려 보냈다. 창업공신이 질병에 걸리자 손권이 신경 씀이 여몽과 능통이 가자 으뜸이었고 주연이 그다음이었다. 향년 68세로 적오 12년에 졸하자 손권이 소복을 입고 거애 하며 그를 위해 슬퍼했다. 아들 적績이 뒤를 이었다.(赤烏五年, 征柤中, 魏將蒲忠・胡質各將數千人, 忠要遮險隘, 圖斷然後, 質爲忠繼援. 時然所督兵將先四出, 聞問不暇收合, 便將帳下見兵八百人逆掩. 忠戰不利, 質等皆退. 九年, 復征柤中, 魏將李興等聞然深入, 率步騎六千斷然後道, 然夜出逆之, 軍以勝反. 先是, 歸義馬茂懷姦, 覺誅, 權深忿之. 然臨行上疏曰: “馬茂小子, 敢負恩養. 臣今奉天威, 事蒙克捷, 欲令所獲, 震耀遠近, 方舟塞江, 使足可觀, 以解上下之忿. 惟陛下識臣先言, 責臣後效.” 權時抑表不出. 然既獻捷, 羣臣上賀, 權乃舉酒作樂, 而出然表曰: “此家前初有表, 孤以爲難必, 今果如其言, 可謂明於見事也.” 遣使拜然爲左大司馬・右軍師. 然長不盈七尺, 氣候分明, 內行脩絜, 其所文采, 惟施軍器, 餘皆質素. 終日欽欽, 常在戰場, 臨急膽定, 尤過絕人, 雖世無事, 每朝夕嚴鼓, 兵在營者, 咸行裝就隊, 以此玩敵, 使不知所備, 故出輒有功. 諸葛瑾子融・步騭子協, 雖各襲任, 權特復使然總爲大督. 又陸遜亦(本)〔卒〕, 功臣名將存者惟然, 莫與比隆. 寢疾二年, 後漸增篤, 權晝爲減膳, 夜爲不寐, 中使醫藥口食之物, 相望於道. 然每遣使表疾病消息, 權輒召見, 口自問訊, 入賜酒食, 出送布帛. 自創業功臣疾病, 權意之所鍾, 呂蒙・淩統最重, 然其次矣. 年六十八, 赤烏十二年卒, 權素服舉哀, 爲之感慟. 子績嗣.)

*뒤에 주적전으로 이어지나 생략

중국 마안산시 주연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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