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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사람들

사동궁 이건 부인의 친일행적

자불어 2024. 3. 2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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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의 적장자는 모모야마 겐이치(1909~1990)다. 옛 이름은 이건李鍵으로, 누가 시켜 개명한 게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이은 가족은 모두 조선명, 이건공은 성마저 왜놈식으로”

패망한 군국주의 일본과 같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황족들이 이제는 일반인민들과 같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거니와 이 황족들과 같이 왕족에서 물러난 이조 왕족의 자손들의 동향 한토막. 
이태왕의 삼자인 이은(52세) 해방 후 시부야에서 과자 가게를 경영하며 조선이 그리워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말까지 하였다는데 지난번에는 조선식으로 자기 처 이본궁방자(48) 아들 구와 같이 개명까지 하였다 한다. 즉 이은李垠은 은흥垠興 처는 유희兪嬉 아들은 구학玖學으로 개명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은의 사촌인 이건공은 성명까지 도산건일桃山虔一이라고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고 일본인 되기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한성일보 1948.5.20.]

덕혜옹주와 이건(매일신보 1926.12.2.)

여기서 “성마저 왜놈식으로” 바꾼 이건, 즉 모모야마 겐이치는 고종, 순종이 일본에 나라를 바치기 전까지 의친왕이었던 이강의 적장자다. 그는 1926년 왕공가궤범이 공포되면서 ‘전하’ 호칭을 받았다. 다른 왕공가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의 부인은 마쓰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 1911~2006)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사누키 다카마쓰의 옛 번주 출신으로 그녀의 할아버지 마쓰다이라 요리토시(松平頼聰)는 백작이었으며, 아버지 마쓰다이라 유타카(松平胖)는 그 11번째 아들로 해군 대좌로 예편했다.

이건공비 전하 손수 위문대慰問袋를 만들어 지나 파견군에게 하사
이건공비 성자誠子 전하는 대륙에서 활약하는 황군장병의 노고를 떠올리며 손수 만든 위문대 10개를 하사했는데, 이건공 부관 나나미(名波) 중좌는 3일 오후 육군성을 방문해 전달하고 공비 전하의 마음에 계원 일동은 모두 감격하며 북지나 파견군에게 모두 전달했다. (부산일보 1940.2.4.)

위문대는 전쟁터의 병사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편지와 일용품을 넣은 자루를 말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용품으로는 비누, 사탕이나 캐러멜, 통조림, 그림엽서, 편지지가 일반적이나 인형이나 천인침(千人針) 같은 주술적인 물건을 넣기도 했다. 전쟁 종반으로 갈 수도록 후방에서도 물자부족이 만성화되고 또 일본에 대한 직접 공습이 실시되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위문대 제작 - 수원광교박물관 소장 사진 엽서

싸우는 여성을 시찰 – 이본궁梨本宮, 이건공 양비 전하
황송하게도 황후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이본궁비, 이건공비 양 전하께서는 총후銃後[후방] 증산부문 등 기타 각 방면에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여성의 활동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효고현을 14일부터 3일간 현 하의 농촌, 공장, 수산장, 어업조합 등 20개 소를 상세하게 순력 하시며 시종일관 열심히 다니시고 17일 오전 9시 55분 기노사키 역(城崎驛, 현 효고 도요오카 시)을 출발해 현을 떠나셨다.(경성일보 1943.6.18.)

이본궁은 이왕 이은의 부인으로 훗날 이방자로 개명했다. 이왕실은 황국신민답게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남성은 장교로 참전하고 여성은 후방에서 지원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답일까. 이건공비는 훈1등을 수여받았다.

이건공비 전하에 훈 1등 친수
천황폐하께서는 6일 오전11시 학문소學問所에서 이건공비 성자 전하께 다음과 같이 훈 1등 보관장을 친수 하셨다. 그리고 공비 전하께서는 다시 천황, 황후 양 폐하께 대면하여 예를 올리고 나오셨다.(매일신보 1941.10.7.)

여기서 의문을 가질 것이다. 다른 왕실가족들에게는 훈1등을 안 주고 유독 이건공비에게만 줬던가. 이유는 바로 이씨 왕실의 다른 가족들은 진작에 다 받았기 때문이다. 1912년 한일병합기념장 수여식 때  이태왕(고종) 이하 모두가 받았다. 부인들까지도.  

혹자는 말한다. 왕공족이었기에 강요당했고 또 어쩔 수 없었다고. 이는 호의호식 다 누린 자들의 자기변명일 뿐이다. 나라를 빼앗겨도 자기 목숨 걸지도 못할 황족이나 왕족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넌센스 아닐까.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에게 왕공족 누구 하나 손 하나 건드린 적 있던가? 종종 덕수궁에 모아 놓고 파티는 하셨던데, 다음은 대한제국이 망한 뒤 덕수궁, 창덕궁에서 열렸던 연회나 정리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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