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순정효황후, 친일 단체, 애국금차회에 기부하다 본문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병참 지원을 위해 조선의 자원을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의 개명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총후銃後(후방)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며 결성한 단체가 있었으니 바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다. 금차는 금비녀를 말하는데, 마치 예전 금 모으기 운동처럼 금비녀를 모아 전쟁 비용에 보태자는 취지에서 만든 단체다. 중일전쟁 발발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1937년 7월 말 경기여고보에서 결성했다. 이날 바로 김복수金福綏 회장은 금비녀 십 수 개를 들고 용산 조선군사령부로 찾아가 경성요지방위사령관 후카자와 도모히코(深沢友彦)중장에게 헌납식을 거행했고, 이를 영원토록(?) 기념하기 위해 당시 명성 있던 화가 김은호金殷鎬를 불러 그림으로 남겼다. 이것이 훗날 김은호의 대표작이자 그에게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안겨준 "금차헌납"이다. 김은호는 2개월 각고의 노력 끝에 이 그림을 완성해 애국금차회로 전달했고, 애국금차회는 이 그림을 조선총독부로 들고 가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에게 기증했다. 총독부는 이 그림을 인쇄해 여러 곳에 뿌렸다.
이왕대비李王大妃 전하殿下 금차회金釵會에 천원千圓 어하사御下賜
이왕대비 전하께서는 북지나 사변 발발 이래 황군 장병의 노고에 깊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는데 마침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활동을 들으시고 불러 격려, 장려해야겠다는 생각에 29일 동회에 금 1,000원을 하사하셨다. 고마운 말씀에 회원 일동은 몹시 감격했다. 30일 오후 2시부터 애국부인회 본부에서 하사금을 전달받고 일치협력, 총후의 비상시국 극복에 매진한다고 한다.(조선신문 1937.8.31.)
여기 등장하는 이왕대비 전하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주 순종純宗의 부인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다.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 국권피탈 현장에서 국새를 치마 속에 감춰 병합 조약을 막고자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이때 정작 순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행적은 이처럼 다소 의문이다. 애국금차회 회장 김복수는 자작子爵 윤덕영의 부인이다. 윤덕영은 바로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1910년 8월 29일 황후로부터 국새를 빼앗았다는 그 인물이다.
순정효황후가 이런 기부를 한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이왕비 전하의 어기증: 애부위문대에 대하옵서
창덕궁 이왕비 전하께서는 지금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에서 모집 중인 국경방면경비경찰관 헌병에 대하여 위문대 모집하는 것을 찬성하옵서 금일 백원을 어기증하옵셨다고 배문하였더라.(조선일보 1920.12.15.)
1920년대 국경방면경비경찰관 헌병은 삼일운동 이후 중국, 연해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독립군과 싸웠던 최전방 부대다. 1910년 8월 순정효황후의 패기는 깊이 존경하는 바이나 국권피탈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친부 윤덕영과 궤를 같이 했다. 국권피탈 직후에는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이왕비李王妃 국어國語 진취進就
이왕비李王妃 전하殿下께서는 이래로 일본어日本語를 열심熱心 연구硏究하심은 일반一般이 공지共知하는 바이어니와 근경近頃에는 간이簡易한 통상通常 예사禮辭등은 물론勿論하고 기타其他 잡담雜談에 지至하기까지 하등何等의 부자유不自由가 무無히 진취進就하사 일전 총독부인總督夫人이 참후參候한 시時에도 상시常時 일본어日本語로써 담화談話하셨는데 언어言語가 극極히 명석明晳하고 유창流暢하시다더라.(매일신보 1911.5.19.)
이 이야기를 현대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이왕비 전하께서 이래로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심은 일반이 모두 아는 바이어니와 최근에는 간단한 통상 인사 등은 물론이고 기타 잡담에 이르기까지 어떤 불편도 없을 정도로 실력이 성장해 일전 총독 부인이 인사하러 왔을 때도 항상 일본어로 이야기하셨는데, 언어가 명석하고 유창하시다더라.
굳이 일본어로 해야 했을까? 혹자는 황후의 이런 모습을 “시대가 시대인지라 순정효황후 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총독부의 강한 요구에 떠밀려” 그랬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어느 누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총동원 체재로 전환하자 수많은 지식인이 변절했다.
최남선은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으로 감옥에 있으며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분명히 조선 대중이 나에게 기대하는 점, 곧 어떠한 경우에서고 청고한 지조와 강렬한 기흥으로 지켜서 단호한 의사義士의 모범이 되어달라는 상식적 기대에 위반하였다. 내가 변절할 대목, 곧 왕년에 신변의 사정이 지조志操냐 사업事業이냐의 양자 중 그 어느 하나를 골라잡아야 할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사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지식인 역시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일제로부터 "강한 요구"를 받았을 것이다. 최남선 또한 지조냐, 사업이냐 선택의 문제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역사라는 재판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고종과 그의 가족 역시 선택이었다. "모든 역사 인물에게 공과 과가 있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순정효황후도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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