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은 없다 - 세종특별자치시의 역사 왜곡 본문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
요즘 지방자치단체를 보면, 동네 역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난 정부의 가야사 지원 방침엔 경주를 제외한 삼남이 모두 가야라고 외쳤고, 또 어떤 곳에서는 불과 몇 년 유지되었던 후백제를 기념하겠다며 고답적인 학술행사를 연달아 개최했다. 하지만 그런 행사, 기껏 예산 투입해서 해봐야 오히려 근본 없는 동네 밑천 드러내는 꼴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사적지 조성해봐야 그 누구 찾아오지 않는 장소가 될 것이다. 어느 지역 어디나 사람의 숨결이 있었던 곳이고, 또 이야기도 풍성할 텐데, 이야기를 찾아낼 능력이 없으니 국가체(정치집단의 중심지)나 독립운동과 같은 기존 흐름에 얹어내려 하다 이 꼴을 못 면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세종시다. "독립운동 이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따라서 검증 역시 엄격해야 한다. 그저 후손들이 모여, 일가친척의 기억이, 또는 굴비 엮듯이 인맥 엮어서 대충 이야기하면 안되는 것이다. 독립운동 특성상 사료가 남지 않았다면 없는 거다. 당신의 뇌가 그리 인지한다고 해서 그렇구나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나 집에서, 또는 술자리에서 "난 왜놈이 싫어"라고 해서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는 불가하다. 따라서 문서 한 장, 글씨 하나, 사적의 일분일초까지도 면밀히 고증해야 한다.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과 함께 부강면 한옥 2동을 독립운동 사적지로 만들고자 이 자리를 꾸렸다.이 학술행사의 가장 큰 이슈는 한옥 가운데 한 채에서 살았던 김재식의 독립운동 이력이다. 마침 김재식에게는 사후 의친왕에게서 받은 두 개의 문장이 있었다. (신도비명, 송암신정기) 이날 이 두 건의 자료를 두고 의친왕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이영주와 전직 역사학자 이태진은 가공할 만한 가공의 스토리를 펼쳐냈다.
송암 김재식은 대대로 부용면에 세거했던 집안 출신이다. 수완이 좋아 치산도 했고, 그 덕분에 풍류를 즐겨 많은 시를 남겼다. 그리고 후손은 그가 남긴 글을 모아 송암집을 펴냈다. 송암집은 인터넷 백과사전에 그 해제가 나오며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원문도 확인해볼 수 있다. 근데 놀랍게도 김재식을 이야기하러 나온 두 사람 모두 그가 남긴 문집 송암집은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거다. 또 어떤 보도자료에 의암 의친왕 이강이 송암 김재식에게 '암'자를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역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송암은 당호다. '암菴'은 그저 집, 또는 서재란 일반 명사일 뿐인 것이다. 즉 물려주고 말고 할 글자가 아니라는 거다.(이런 주장은 그럴싸하지만 실은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정암(조광조), 표암(강세황), 순암(안정복) 등등이 있는 거다.(이들도 훗날 의친왕을 기리려고 '암'자를 썼다 할텐가?) 기본적인 역사 상식에도 반한다.
이날 학술행사에서는 이영주는 의친왕이 비서였던 김재식을 부강면으로 보내서 차명으로 금광을 운영하게 했다고, 또 지역에서는 부호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의 선친이 무엇을 했는지 아무도 몰라 미스테리라고. 사실일까?
부강리 경주김씨 학은공파는 김임생(1567~1637)의 후손들이다. ...(중략)... 경주김씨 학은공파가 부강에 입향한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김세언이 중종 기사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주 낭성으로 내려오면서 부강면과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임생의 11세손인 송암 김재식은 부강리의 만석지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문화원, 세종시 터전의 뿌리를 찾아서(4) - 조치원읍, 부강면, 보유편(민속원, 2014.)]
김재식 집안은 세종-청주 사이에서 300년 넘게 세거했다. 김재식은 만석지기, 즉 토지로 치산한 것이지 금광과 무관하다. 금광을 포함해 광산은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당연히 당국의 눈을 피할 수 없고, 이는 다 통계로 나온다. 근데 부강 어디에 금광이 있었나? 이영주는 증명할 수 있나? 그 금광이 어디 있었는지. "미스테리" 운운하며 소설을 쓴 것에 불과하다. 즉 허구를 늘어 놓은 것이다.
여기서 제일 한심한 건 최민호 이하 세종특별자치시 공무원들이다. 지역 인물로 현창하겠다는 사람들이 김재식의 문집은 커녕, 지 고장 세종문화원에서 나온 출판물도 안읽어 본 채, 외지 사람들을 불러다 이런 행사를 펼쳤으니 말이다.
김재식에게 하사했다고 하는 송암신정기는 말미의 기년이 "무진팔월하완"으로 1928년 음력 8월 하순이다. 후손들은 송암 사후 유고를 모아 책을 내고자 1928년 9월 서문을 받았다. 자료집 사진에 따르면 김재식은 1860년 11월 23일 태어나 1928년 2월 24일 사망했다. 따라서 해당 현판은 김재식 사후 받은 것이다. 아마도 후손이 신도비명을 세울 때 함께 의뢰했을 것이다. 즉 김재식 생전에 주고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친왕과 김재식의 관계를 증명할 자료는 이 외에는 없다. (문집 어디에도 의친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 비밀요원이어 숨겼다고 하겠지만, 김재식 집에 찾아와 며칠 간 머물렀다며 안부 서신 한 장 없는 게 더 어색하지 않은가?)
또한 해당 기록 중간에, "그의 성은 김이오, 이름은 재식이라..." 아는 사람에게 건넨 글이었다면 이런 내용을 덧붙일 이유가 있을까?
현판 내용도 신정(새 정자) 건립에 대한 기록일 뿐이니 뭐 그닥 특별한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다. 즉 독립운동 운운하며 엮을 수 있는 증좌가 아니라는 거다. 지자체의 과도한 역사 몰입을 보여주는 일례로 기억해 두고자 한다.
자료집을 읽어보고 어처구니 없어 글 하나를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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