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고택 또는 정온 고택의 "모와某窩"라는 현판은 의친왕이 정태균에게 써준 것이다. 그래서 정태균 집안, 그리고 이강 집안은 이것이 두 사람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자랑한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1909년 이강이 거창에 내려가 정태균과 사선대에서 의병을 양성했다고 주장한다.
정부기관 국가유산청의 모 연구사는 몇 년 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리고 국가유산청은 홈페이지로 이 내용을 그대로 서비스 중이다.
"정온 고택 그리고 정태균과 연관된 인물이 있으니, 바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1877~1955)이다. 정온 고택에는 의친왕의 친필 ‘모와(某窩)’라는 현판과 고택에서 15㎞ 떨어진 ‘사선대(思璿臺)’ 등 그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1909년 의친왕이 항일 의병활동 모의를 위해, 구한말 승지이자 절친한 벗 정태균의 사랑채에서 40일 정도 머물렀다. 정태균과 의친왕의 인연 때문일까. 정태균의 동다리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세계일보 2017.7.20.)
국가기관 연구직이 공공의 매체에 글을 쓸 때는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유산청은 기관이 릴리즈 하는 것에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 특히나 인물의 포폄에는 더욱 주의해야 한다. 그럼 이 말은 사실일까?
1935년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해 그간의 공로자들을 대거 표창하고 표창자의 이름을 책으로 남겼다.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자명감(1935)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국내 여러 곳에 남아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은 원문 서비스도 제공한다. 놀랍게도 여기서 정태균의 이름을 본다.
원적: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 주소: 좌동 / 농업 / 정7위 / 정태균 / 사적: 1909년(메이지 42년), 각지에서 폭도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이를 진압하기 위해 위천면에 수비대를 파견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약 1년간 임시 주둔지로 제공하고 그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식량과 물자, 기타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군용 마초를 기증했다. 또한 수비대장의 고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잠과 식사조차 거른 채 밤낮 없이 촌민들의 경솔한 행동을 경계하고 민심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해당 지역의 치안이 빠르게 회복되었던 건 오로지 씨(정태균)의 다대한 헌신 덕분이다. (이하 생략) [記念表彰者名鑑 : 朝鮮總督府 始政二十五周年(1935)]

국가기관 연구자는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은채 (어쩌면 본인의 역량 밖 이야기를) 공공의 매체에 기고한 것이고 국가유산청은 소속 연구자 개인을 다시 전재함으로써 오류를 국가 공인 해설로 만들어 주었다. 즉 나라가 친일파를 독립지사로 둔갑시켜준 셈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물질에 매몰되다 보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다. 이 역시 완물상지의 일종이나 개인뿐 아니라 공공의 역사에도 착란을 일으킨 다는 점에 그 폐해가 더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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