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역사
중국 현대미술의 대가, 조선에서 사랑을 만나다. 본문
장다첸(張大千)은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다. 무언가 자료를 찾던 중 한 신문기사에서 그가 조선을 유람하고 조선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보고 사뭇 놀랐다. 그를 조선으로 초대한 일본인 에토 나미오(江藤濤雄)는 20세기 초 중국 시안에서 장사를 하던 중,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품 구입차 중국에 갔던 동경제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의 조수 역할을 하며 후일 골동품상으로 성장한 자이다. (도쿄 우에노에 상점을 차릴 정도로)
(위의 천녀산화는) 그가 그린 불교인물화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그림 속의 천녀는 사실 그의 이국 연인이었던 조선 소녀 지춘홍(池春紅)이다. 1927년 29세의 장다첸은 일본인 골동상 에토 나미오의 요청에 따라 일본 점령 하의 조선에 방문하여 금강산을 유람한다. 에토는 자신이 직접 함께 다닐 수 없어 15세의 조선 소녀 기생을 고용하여 그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장다첸은 그녀에게 춘홍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장다첸의 회고에 의하면 춘홍은 노래와 춤에 모두 뛰어났으며 서화를 좋아하였다. 두 사람은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춘홍은 곧잘 사람의 뜻을 이해하여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3개월 후 장다첸은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그에게는 이미 두 명의 부인, 정칭롱(曾慶蓉)과 황닝수오(黃凝素)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춘홍을 데리고 사진관에 가 함께 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그 사진 위에 진정시(陳情詩) 두 수를 써서 황닝수오에게 보냈다. 이는 이역에서 들인 첩을 부인이 받아 줄지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천손을 향해 소식 물어보려 하니 은하는 작은 별들이 들어와 숨는 것을 허락한다 하네.(欲向天孫問消息,銀河可許小星藏)”라 하였다. 그러나 황부인은 이를 거절했고 장다첸의 모친 증태부인(曾太夫人)도 즉시 집으로 돌아오라 하였다. 장대천은 부득불 바로 행장을 꾸려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랑에 빠진 지춘홍은 장다첸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겠노라고 서약했다. 장다첸도 차마 쉽게 헤어질 수 없어 그녀에게 작품과 재산을 주어 경성(京城)에 한약점을 개업하도록 하여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1년 후 지춘홍은 장다첸이 도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어로 장문의 연정 서신을 써서 에토를 통해 전달했다. 그 때 장다첸은 심한 독감에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서신을 보고 몹시 감동하여 중국 고체시의 격식으로 서신을 번역하여 춘낭곡(春娘曲)을 지었다.
병이 완쾌된 후 장다첸은 바로 조선에 가 지춘홍을 만났다. 두 사람은 계속 연락을 했고 아후 장다첸도 몇 차례나 조선을 방문했다. 1935년 장다첸은 대풍당(大風堂) 천녀산화(天女散花)를 제작하여 연정의 마음을 표현했다.
193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두 사람의 연락은 끊겼다. 전쟁 승리 후 에토는 다시 장다첸과 연락했고, 에토는 그에게 지춘홍이 1939년 일본에 항거하다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장다첸은 비분강개하여 바로 “지봉군지묘(池鳳君之墓)”라는 글을 써 한국에 보내 지춘홍의 묘를 수리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30여 년이 지난 후 장다첸은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때 지춘홍 오빠의 안내로 묘소를 찾아 향을 올리고 제를 지내 오랜 숙원을 풀었다.
장다첸은 평생 10여수의 애정시를 남겼고 이 가운데 지춘홍에게 준 것이 6수였다. 그는 생전에 많은 여성들과 사귀었고 4명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시를 보면 지춘홍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으니, 결코 문인이 풍류로 일삼은 그저그런 염정시가 아니었다. 당시 그는 일본 점령 하의 베이핑(北平)에서 스촨(四川)으로 피난 가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그 과정에서 갖고 있는 물건들은 버릴 수 있는 대로 버렸지만 이 천녀산화와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춘홍의 형상은 장다첸의 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녀는 청상원(清商怨), 홍불녀(紅拂女), 미인쌍접도(美人雙蝶圖) 등에서 어떤 때는 고대의 사녀(仕女)로 또 어떤 때는 선불인물(仙佛人物)로, 그리고 이따금은 모던 걸로 등장한다. 그러나 벽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선염 묘사한 것은 아마도 이 천녀산화 뿐일 것이다. 천녀산화의 천녀의 모습은 차분하고 얌전한 모습이나 필치나 먹선은 종이 밖으로 뛰쳐나올 듯하다. 참혹한 전란 시기에 사랑하는 여인의 처참한 운명은 사람들을 탄식케 한다.
(2010年11月18日 新華日報 참고)
'세상 둘러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화문 비각: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3) (0) | 2021.07.30 |
---|---|
광화문 비각: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2) (0) | 2021.07.28 |
광화문 비각: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1) (0) | 2021.07.27 |
현해탄玄海灘,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 (0) | 2021.07.09 |
때에 맞춰 월식이 일어나는 것은 재앙이 아니다. (0) | 2021.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