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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망대, 이태원 부군당

이태원梨泰院, 조선시대 한성의 원院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의 교통 시설로 역驛과 원이 있었는데, 역이 공무원용 터미널이었다면 원은 호텔이라, 역에서는 말을 빌려 또는 바꿔 타고, 원에서는 숙식을 제공받았다. 옛 한성부에는 역으로는 노원역과 청파역, 원으로는 보제원, 홍제원, 그리고 이태원이 있었다. 미군이 서울에 주둔한 이래, 우리의 대표 수출품이 다람쥐(진짜 살아있는 거)였던 때부터 이태원은 국제적 동네였다. 일제강점기 마을 전설에 따르면 이태원은 본디 이태원異胎院(다른 태아가 있는 원)이란 이야기가 있으니, 임진왜란 때 한양에 주둔했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범했던 여성들이 이곳에 모여 살며 그때 가진 아이를 낳았다고 하여 그리 불렸다는 거다. 전쟁의 참혹상이긴 하나, 더 비참한 건 그들이 모여..

세상 둘러보기 2024.02.11

오래된 고민 탈모, 일제강점기 발모제

탈모는 예나 지금이나 현대 의학의 난제 가운데 하나다. 원형 탈모 상담하러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대머리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이라고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웃음으로 승화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대학 다닐 때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친구는 "레닌, 트로츠키, 세상을 바꾼 이들은 모두 탈모인"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또 어떤 선배는 전대협이 실은 "전국 대머리 연합회"의 줄임말이라고도 했다. 이런 농담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니, 세기말 괴작 "이나중 탁구부"에서는 무지개가 "7명의 대머리 노인들이 나라가 정해주는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여 만든 것"이라는 놀라운 학설을 던졌으며, 뮤지컬 "스위니 토드"에서는 사기꾼..

세상 둘러보기 2024.02.10

명동예술극장, 옛 경성 명치좌

명동지하도에서 올라와 줄지어 있는 먹거리 노점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왼편에 고풍스러운 건물 한 동이 있다. 국립극장 명동예술극장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메이지자(또는 명치좌明治座)’로 불렸던 영화관이다. 메이지자는 현재까지 도호(東寶), 도에이(東映)와 더불어 일본 삼대 영화사로 불리는 쇼치쿠(松竹)가 만든 영화관이다. 쇼치쿠는 1895년 공연장 영업을 시작해 1920년 쇼치쿠 키네마 합명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에는 제국활동사진주식회사를 세우고 1923년 오사카쇼치쿠자大阪松竹座, 1930년 도쿄극장(東京劇場) 등을 열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부터는 조선에 진출, 영화를 보급하는 한편 조선인 배우도 물색했다. 메이지자의 건축은 초대 극장장인 이시하라 료스케(石橋良介)가 ..

세상 둘러보기 2024.02.05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서울 인왕산은 궁궐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산으로 불렸다. 방어 시설로 산자락을 따라 성곽이 있다. 오늘은 인왕산에 있는 문화유산 국사당과 선바위를 보러 올라갔다.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은 대개 사직단社稷壇이나 황학정黃鶴亭, 또는 수성동 계곡으로 능선을 타고 이동하기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리지만 국사당과 선바위를 보려면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에서 내려서 가는 것이 편리하다. / 지도는 맨 뒤에 첨부 아파트 단지를 끼로 올라가다 보면 인왕사仁王寺 일주문이 나온다. 인왕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된 사찰이나 연산군 때 궁궐이 내려다보인다고 하여 폐사되었다. 이후로 언젠가 다시 생겼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명맥이 끊겼다고 한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유서산기遊西山記에서, “석굴의..

세상 둘러보기 2024.01.28

서울 구 미국문화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울 구 미국문화원이다. 구 서울 미국문화원이라고 해야 하나 '구 서울'이 마음에 걸려 이리 지은 듯하다. 지하철로는 시청역(1,2호선) 또는 을지로입구역(2호선)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된다. 롯데호텔 차량 출입구 바로 맞은편에 있다. 이 건물은 본디 미쓰이물산(삼정물산三井物産) 경성지점 사옥이었다. 미쓰이물산은 메이지 시대 외국 상회가 독점했던 무역의 주도권을 일본이 되찾고자 1876년 설립했다. 면사방적기계와 면화를 수입하고 생사, 면사, 면포의 수출을 담당했다. 곧 일본 면사 수출의 절반을 다룰 정도로 성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도 발 빠르게 진출했다. (관삼출구官蔘出口) 객년 12월 27일 연태煙台에 향할 차를 인(천)항에서 출범한 창룡호蒼龍號가 인항해관창고(인천항..

세상 둘러보기 2024.01.28

파주 보광사

파주 광탄면 고령산 보광사普光寺는 사찰 기록에 진성여왕 8년(894)에 도선국사(827~898)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조선을 이어오며 여러 차례 중창되었으나 현재의 사세를 갖춘 계기는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의 원당이 되면서로 보인다. 이후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며, 고종 때 상궁들에 의해 취전鷲殿을 비롯하여 건물 단청과 불화를 조성했다. 조선시대까지는 고령사高嶺寺로 불렸던 듯싶다. 동국여지승람뿐 아니라 이곳에 유람왔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도 시에서 ‘고령사’라고 했다. 벽제碧蹄 碧蹄驛上雨新晴 벽제역 가에는 비가 처음 개었고 高嶺寺前溪水生 고령사 앞에는 시냇물이 불었는데 十里靑山羸馬影 십 리라 청산 곁엔 말의 그림자 파리하고 一鞭紅日急砧聲 한 채찍 석양 아랜 다듬이소리 급하여라 乾坤濩..

세상 둘러보기 2024.01.27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

국립중앙박물관의 새로운 랜드마크, 이제 학생도, 어른도 여기서 모인다.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린 비석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잡았던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 지안시(集安市)에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주변으로는 태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의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이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비나 광개토왕비(능비 여부 논쟁?) 또는 호태왕비(시호 축약형) 등으로 불린다. 그래서 관련 도서를 찾기 위해서는 이 모든 단어를 한 번씩 입력해야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이하 비석으로 축약)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 사후 414년 9월 29일(음력) 왕릉을 조성하고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은 대략 1면에는 ..

세상 둘러보기 2024.01.27

조선총독부, 식민지를 매질로 다스리다.

태형 중부 수진동 30통 5호에서 술장사로 영업하는 최광훈은 나이 지금 34세, 그 집에 있는 김소사는 나이 지금 48세, 중부 염천골 18통 가 1호에 사는 무업자 이기영은 나이 지금 58세인데 지나간 20일 오후 4시경에 최광훈의 집에 회동하여 화투를 하다가 그곳에서 순사에게 발견되어 소관 경찰서로 잡아갔는데 그곳에서 심사한 결과로 김소사는 무죄에 처했고 최광훈, 이기영 두 사람은 각각 볼기 30도를 때려 즉결처분하고 풀어줬다더라. (매일신보 1912.3.28.)인간에게 바로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래 전부터 매질은 형벌로 사용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가학적인 형태의 매질이 사라지고 매질의 기본 체계가 등장한 것은 당나라 때였다. 당나라의 법전인 당률은 매질을 태형과 장형으로 구분하고 각각 매..

세상 둘러보기 2024.01.16

2024 대만 선거 결과와 중국의 반응

2024년 1월 13일 중화민국 제16대 정부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라이칭더賴淸德가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투표율은 71.85%, 득표율은 40.5%(550만표)다. 이번 선거는 민진당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장기 집권 피로감에 연이은 미투 사건, 바다 건너 중국의 위협까지.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민진당 승리. 라이칭더는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 카오슝 대표 도시에서 모두 승리했다. (국민당은 치룽, 화리엔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우리로 따지면 국회의원인 입법위원 선거 결과는 사뭇 달랐다. 국민당 52명, 민진당 51명, 국민당이 1석 차이로 다수당이 되었다. 이는 2016년 68:35, 2020년 61:38과 비교하면 국민당의 화려한 부활이라 할 수 있다. 정상적 선거로 여소야대가 된 ..

세상 둘러보기 2024.01.14

대한제국 현충원, 장충단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 내려 국립극장 또는 자유총연맹 방향 초입에 장충단공원이 있다. 장충단은 대한제국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제향을 올리고자 1900년에 세운 현충시설이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광무4년(1900) 10월 27일(양력)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첫 제향은 이해 11월 10일 정오에 거행되었다. 소나무로 홍여문虹如門을 세우고 국기를 사면에 게양하고 단의 제1위에는 홍계훈洪啟薰을, 제2위에는 이경직李耕稙의 신위를 두고 이하 전몰자들의 위패를 세웠다. 이때 각부府, 부部, 원院 대소 관인과 각대 장졸, 무관학도가 모여 도열하고 군악을 연주했다. 또한 전몰자 가족들도 초청되어 오후 4시에 끝났다. 홍계훈은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에서 일본군을 막다가 전..

세상 둘러보기 202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