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고종 (23)
일상 역사

얼마 전 우연히 어떤 글을 보았다. 그 글은 고종과 그 일족에 대한 비난을 "식민사관"으로 치부하며, 손톱만한 독립운동, 또는 뇌피셜 속 저항의식을 미화, 분칠하고 있었다. 후손이 조상의 어두움을 가리고 또 작은 기여를 현창으로 포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함부로 그들의 과오를, 또 역사적 사실을 "식민사관"으로 덮어버리려는 모습을 보며, 진정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참모습을 모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 몇 년 전 왕실 후손 한 명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황제 즉위식을 열었다. 황제에 옹립된 이는 고종의 손녀이자 이강 공(의친왕)의 딸 이해원이었다. 1919년 태어나 일제강점기 내내 운현궁에서 호의호식하고 또 경기여고, 게이오대학(경응의숙) 법문학부까지 졸업했으나 광복 이후 스스로 생계를 ..

"고종이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모 국회의원 후보자가 고종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 구설에 올랐다. 후보자는 “고종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밤마다 파티를 했어. 그래서 나라를 망친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역사’라는 타이틀을 붙여 이야기할 때는 근거 없이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그럼 고종의 일상은 어땠을까? 경술국치 이후 고종이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자가 많고 옛 문투라 대충 고쳐보면 아래와 같다. 이태왕 전하의 근황(近狀) 이태왕 전하의 근황을 알아본(漏聞) 즉 매일 오전 10시경에 기침하시어 즉시 조찬을 받으시고 오후 2시경에 서양 요리를 받으시며 오후 7시 혹은 8시에 조선 요리를 받으시는 것이 상례라 하며 또 취침하시는 시각은 대개 오후 10..

1월 황족 친목회는 이우李鍝 공 전하의 주최로 26일 오후 3시부터 시부야 도키와마츠(常盤松)의 어전에서 지치부노미야(秩父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친왕과 왕비 양전하를 필두로 각 황족 분들이 모여 해군종군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를 초청해 “전장의 흙먼지를 줍다”는 제목으로 소강부대遡江部隊의 활약 관전담을 약 1시간에 걸쳐 청취, 마치고 다과회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고 5시에 산회했다. (사진은 요시카와 에이지 씨)[경성일보 1938.11.27.] 이날 행사의 강연자인 요시카와 에이지는 20세기 일본의 대표적 통속소설 작가로 삼국지, 미야모토 무사시 등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이야기했다는 소강부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부대'를..

일제의 잔재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그 시대가 진정 치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흔적을 지우고 없애려고 힘쓰는 이들이야말로 증거를 인멸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자들이다. 몇 년 전 충청남도 부여의 사자루 현판 사건은 그 대표적 일례다. 부여는 백제의 고도로 부소산성은 수도가 위기에 처할 때 농성 하고자 만든 산성이다. 오늘날 부소산성 정상에는 사자루라고 하는 누정이 있다.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의 다른 이름이 사자산泗泚山이오, 부소산성의 다른 이름이 사자성泗泚城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나 부여의 옛 이름이 사비泗沘인 데다 한자도 비슷하게 생겨 ‘사비루’로 잘못 읽히기도 했다. 앞면 3칸, 옆면 2..

의친왕 이강의 적장자는 모모야마 겐이치(1909~1990)다. 옛 이름은 이건李鍵으로, 누가 시켜 개명한 게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이은 가족은 모두 조선명, 이건공은 성마저 왜놈식으로” 패망한 군국주의 일본과 같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황족들이 이제는 일반인민들과 같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거니와 이 황족들과 같이 왕족에서 물러난 이조 왕족의 자손들의 동향 한토막. 이태왕의 삼자인 이은(52세) 해방 후 시부야에서 과자 가게를 경영하며 조선이 그리워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말까지 하였다는데 지난번에는 조선식으로 자기 처 이본궁방자(48) 아들 구와 같이 개명까지 하였다 한다. 즉 이은李垠은 은흥垠興 처는 유희兪嬉 아들은 구학玖學으로 개명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은의 사촌인 이건공은 성명까..

20세기 전후 아시아의 군주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사진 찍기를 싫어했던 사람과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사람.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이 드러날까 두려워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많지 않다. 반면 대한제국 고종의 경우, 사진에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무당을 신뢰해 왕실 재정으로 궁궐 곁에 관우 사당도 차려주고, 눈 밖에 난 신하는 외국까지 자객을 보내 암살하고 또 그것으로 모자라 또 시신을 갖고 오게 해서 팔도에 뿌렸던 임금이었으나 커피를 좋아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기호만큼은 참으로 '모던'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도 꽤 많다. 역사 기록물로서 사진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떤 계기로 찍었는지가 중요하다. 오늘 옛 신문을 보다가 고종의 가족사진 가운..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할 때 제일의 부자는 왕실이었다. 왕실은 역둔토며 전국의 산림수택을 소유했다. 군함 하나 사는 데도 낑낑거렸던 대한국이었지만 이권이 있는 곳에는 황실이 있었다.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족 또는 왕족 가운데 어장 소유자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의화군, 대한제국의 의친왕, 일제강점기의 이강공, 즉 이강李堈이다.고종, 바다가 자기 것이라며 왕자에게 주다통영군 연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민 3,268명은 연명하여 이영재, 옥치기, 이주목, 김종혁, 황치종 등을 대표자로 해서 이강공 전하 소유의 어장(漁區)개방 청원을 총독부와 이강공저李堈公邸에 제출하였는데, 그 일에 대해 혹 이강공저 사무관 구로자키(黒崎) 이강공저 사무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강공 저하 소유의 어장에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 내려 국립극장 또는 자유총연맹 방향 초입에 장충단공원이 있다. 장충단은 대한제국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제향을 올리고자 1900년에 세운 현충시설이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광무4년(1900) 10월 27일(양력)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첫 제향은 이해 11월 10일 정오에 거행되었다. 소나무로 홍여문虹如門을 세우고 국기를 사면에 게양하고 단의 제1위에는 홍계훈洪啟薰을, 제2위에는 이경직李耕稙의 신위를 두고 이하 전몰자들의 위패를 세웠다. 이때 각부府, 부部, 원院 대소 관인과 각대 장졸, 무관학도가 모여 도열하고 군악을 연주했다. 또한 전몰자 가족들도 초청되어 오후 4시에 끝났다. 홍계훈은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에서 일본군을 막다가 전..

현재 장충단 공원 앞의 비석, 즉 장충단비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1900년 장충단을 건립할 때 세운 것이다. 앞은 황태자(훗날의 순종)이 쓰고 뒤의 본문은 1905년 을사늑약 후 순국한 민영환이 썼다. 아래는 그 번역문과 원문이다. [앞] 예필(황태자 글씨) 장충단 [뒤]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성인을 능가하고 운수는 중흥을 맞이해 커다란 반석을 다지고 위기를 경계하셨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 더러 어려움이 닥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 갑오년, 을미년의 사변이 있었다. 무신武臣으로 난에 몸을 던져 목숨을 바친 자 많았으니, 슬프도다! 그 굳건함은 눈과 서리에도 당당하며 그 명성(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영원토록 제향을 올리고 변치 않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터, 이에 성상께서 특별히 포충..

3. 끝내 열리지 못한 행사 즉위 40주년 기념식 10월 18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10월 4일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고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예원 경 서리(掌禮院卿署理) 이용선(李容善)이 아뢰기를, "왕위에 오른 40돌 경축 의식을 음력 계묘년(1903) 4월 4일로 날을 받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조금 더 자세하다.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이듬해 좋은 날로 잡아 거행하도록 조서를 내리심이 어떠하십니까. 장예원에 명하여 다시 날짜를 선정해 거행하겠다는 뜻을 전하겠사옵니다. 상주한 대로 하라. 장예원경 서리, 장예원 소경 이용선이 상주합니다. 의정부 주본에 의거하여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다시 날자를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