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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어떤 이들은 의화군, 훗날 의친왕 이강이 미국에서 유학생과 한국 독립의 뜻을 함께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강의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음 기사 역시 이강의 미국 생활을 잘 보여준다. 아래는 버지니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간지 Richmond Dispatch, January 22, 1902.에 실린 글이다. (정병준 선생님 논문의 각주를 보고 원문을 확인, 번역해 싣는다.) 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는 분은 필독하시기 바란다. 1902년이 대한제국에게 어떤 기간이었는지 생각하면 더 기가 막힌다. 왕자, "흥청망청"뉴욕 관광에 3만불을, 은행에 고소당한 한국 국왕의 둘째 아들 (뉴욕 월드의 워싱턴 특파원) 한국 국왕의 차남인 의화(Euiwha) 왕자는 누구 못지않게 “아름..
의화군 이강, 훗날 의친왕은 행실이 불량했다. 이는 이방자도, 윤치호도 지적한 바 있다. 일단 그에게는 낭비벽이 있었다. 의친왕의 후손들은 의친왕의 미국 유학하며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목도했듯 그는 "유學"하며 공부에 별 뜻을 두지 않았다. 나라는 풍전등화에, 백성들은 주렸지만 의친왕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 매년 대한제국은 그에게 매년 4,000달러를 보내주었음에도 그는 미국의 대부업자들에게 30,000달러라는 거액의 빚을 졌다. 미국신문은 동양의 작은 나라 왕자의 거대한 씀씀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사진 아래 번역 있음) 돈을 기다리며 왕자의 코니아일랜드 방문, 대부업자의 청구서엔 3만 달러가. 뉴욕, 2월 6일: 한국 이희 왕(고종)의 셋째 아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