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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국회에서 12월 17일부터 사흘간 "고종의 부국강병 프로젝트"라는 전시가 열렸다고 한다. 몇 개의 X 배너에 하고 싶은 이야기와 사진을 잔뜩 넣어 열린 이 전시의 몇 개 문구를 살펴본다. 첫번째 배너에 실린 순종 황제 소개다.(아래 사진이 희미해 글로 옮긴다.)순종은 성인이 된 후 '독살 미수 사건'을 겪으며 그렇잖아도 안 좋던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순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고종이 1907년에 강제로 퇴위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장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해 신원 불명의 두 사람(아마도 내관으로 추정)이 대역을 맡아했다. 순종은 이완용 외에 각부 대신의 이름을 거명하며 "오직 나라만 생각하라"한 후 황제의 상징인 대한제국 대원수복으로 갈아입고 어좌에 앉았다. 건강상의 문제로 무능할 수 밖에..

*고종이 "을사조약의 폐기에 일도 노력하지 않았다"는 저의 착오가 있어 원고를 수정해 게재합니다. 고종 또는 순종을 미화하는 사람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믿을 수 없는 자료로 치부한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막대한 1차 사료가 있다며 그것을 번역하면 고종과 순종에 대한 재조명이라도 벌어질 듯 내심 기대한다. 그 1차 사료 가운데 하나가 승정원일기다. 나무위키 승정원일기 항목에는 그런 희망이 그대로 담겨있다.“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을사늑약 체결 열흘 뒤인 광무9년(1905) 11월 27일,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상소를 올린다. 신들이 근심과 울분에 사로잡혀 망령되게 저희들의 생각을 아뢰고 모여..

#세종시와대한황실의독립운동기록과시대의증언 비판 03. 의친왕 독립선언서의 진실 의친왕이 독립선언을?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요?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의친왕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포럼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역사왜곡으로 점철된 “집안 띄어주기”에 불과했다. 그날 허위 사실을 하나씩 잡아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의친왕이 서명(?)했다는 "제2독립선언서"의 진실이다. 의친왕기념사업회장 이준은 자료집에 대동단 독립선언서 사진을 게재하고 아래 설명을 부기했다.“대동단 독립선언서. 일제 치하에서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에서 평민이 되고자 했던 의친왕은 독립선언서 33인 중 제일 첫 번째로 ‘의친왕’이 아닌 ‘이강’으로 서명을 한다. 전협, 김가진 등 당대..

어떤 이들은 의화군, 훗날 의친왕 이강이 미국에서 유학생과 한국 독립의 뜻을 함께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강의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음 기사 역시 이강의 미국 생활을 잘 보여준다. 아래는 버지니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간지 Richmond Dispatch, January 22, 1902.에 실린 글이다. (정병준 선생님 논문의 각주를 보고 원문을 확인, 번역해 싣는다.) 의친왕이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는 분은 필독하시기 바란다. 1902년이 대한제국에게 어떤 기간이었는지 생각하면 더 기가 막힌다. 왕자, "흥청망청"뉴욕 관광에 3만불을, 은행에 고소당한 한국 국왕의 둘째 아들 (뉴욕 월드의 워싱턴 특파원) 한국 국왕의 차남인 의화(Euiwha) 왕자는 누구 못지않게 “아름..

나무위키는 의친왕 육남 "이곤(李錕, 1919~1984)" 항목에 그가 "릿쇼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래서 영어와 독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의친왕기념사업회 홈페이지도 "릿쇼대학 영문과 졸업"이라고 했다. 그러나 1950년대 평화신문은 그가 졸업한 학교가 릿쇼"대학"이 아니라 릿쇼"중학"이라고 언급했다. 이곤(일명 이명길)씨는 4253년(1920) 11월 4일 이강 공의 육남으로서 모친 김씨(이강공의 삼첩三妾)의 몸에서 출생한 후 8세 때에 일본에 도항하여 동경 입회소학교立會小學校를 졸업하고 동경 사립 입정중학교立正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에서 중퇴하였다고 한다. 4271년(1938) 8월에 귀국하여 시내 종로구 견지동 85 사동궁에 거주 시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면 금곡리 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