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당 (7)
일상 역사
'물시계'라고 하면 세종 때 만든 조선시대의 자격루를 떠올릴 것이다. 물을 흘러내려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인 물시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낮에는 해로 시간을 측정하면 되지만 해마저 잠든 밤에는 시간을 측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간의簡儀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같은 일종의 별시계도 있었지만 잠 안 자고 내내 별을 관측하며 시간을 측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밤의 시간은 대체로 물시계에 의존했다. 초기의 물시계는 통 밑에 구멍을 낸 것이었다. 물시계에 샐 '루漏' 자를 쓰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중국에는 한대漢代 간단한 물시계인 누기漏器가 실물로 남아 있다.(원통형 금속 용기 아래 물이 빠지는 구멍이 있다.) 자격루처럼 여러 통을 두고 마지막 통에 부표를 넣어 떠오르게 하는 방식의 물시계는..
신라와 당은 오랜 시간 사절을 주고받았다. 당시 바다를 건너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바다를 건너오다 사고를 당한 사신 이야기도 나온다. 당나라 사신 가운데 처음 이름을 올린 사람이 주자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48년(626) 가을 7월에 당唐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했다. 당 고조高祖가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고구려와 서로 화친할 것을 권유하는 조서를 내렸다." 당나라 사신들의 이름은 종종 언급되나 구당서나 신당서 열전에 입전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주자사는 유학전儒學傳에 실려있다. 이는 그만큼 동시대 그의 학문이나 글솜씨가 인정받았던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의 열전을 옮겨 본다. (*밑줄은 번역에 자신 없는 부분이니, 언제든지 댓..
아침에 멀뚱멀뚱 일어나 연말 마감해야 할 것을 둘러보다 우연히 남송 요관姚寬의 서계총어西溪叢語를 읽게 되었다. 찾던 내용과 상관없이 개원통보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개원통보하면 다들 헷갈려하는 것이, 1. 개원통보는 당대의 동전으로 당 현종 개원연간의 물건이 아니라 당 고조 무덕4년(621)에 처음 주조한 것이다. 이 내용은 당서 식화지에 나오기 때문에 빼박캔트,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많이들 틀린다. 2. "개통원보"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당육전에서는 개통원보라고 했다며... 그러나 아래 요관이 명쾌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당나라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궁금한 이 하나 없었으랴. 개원통보이니 개통원보로 잘못 읽고 우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 궁금..
이하는 구당서 설인귀 열전을 번역한 것이다. 설인귀는 평민 출신으로 뛰어난 무공으로 장수까지 올라갔다. 고구려 침공 시 선봉에서 섰으며, 신라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요동 지역 뿐 아니라 서역, 대 토번전에서도 활약했다. 당 전기 장수 돌려막기의 대표적 카드로 활용되었던 장수다. 이는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 지금부터 전, 후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설인귀薛仁貴는 강주絳州 용문인龍門人이다. 정관貞觀 말년 태종太宗이 요동遼東을 친정親征하자 인귀仁貴가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에게 응모應募하여 종군하겠다고 청했다. 안지安地에 도착해 낭장郎將 유군앙劉君昂이 적에게 포위되어 다급해지자 인귀가 구하러 갔다. 말을 잽싸게 달려 도착해 손수 적장의 머리를 베고 그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자 적들 ..
이하는 헝가리계 영국인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Sir Marc Aurel Stein, 1862~1943)의 투루판 아스타나 고대무덤 발굴 기록으로 그의 저서 Innermost Asia(Oxford, 1928)에 수록되어 있다. 14장 아스타나 고대 무덤 1. 7세기 무덤(그룹i) 무덤의 위치 1월 18일, 프레스코 벽화를 떼어내는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나익 삼수딘(Naik Shamsuddin)을 남겨두고나는 캠프(camp)를 무르툭(Murtuk)에서 카라호자의 베이스(base)로 옮겼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고대 고창의 무덤 탐사를 시작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작품을 투르판 지구에 머무는 후반부를 위해 남겨두었는데, 이런 종류의 고고학적 탐사가 다수 중국인이 거주하는 인구 밀집 오아시스 인근에서 수행될..
이주는 오늘날의 하미이다. 태종 때 이오의 호인이 귀부하자 서이주를 설치했다.(630) 처음에는 기미주로 운영하다가 이주로 이름을 바꾸고 직할 주로 편재했다. 돈황 발견 천계원년 사주이주지지(沙州伊州地志)에 “보응연간(762~763) 토번에 함락되었다. 대중4년(860) 장의조가 수복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보응 원년 하서 제주는 여전히 건재했다. 아래 기록은 이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원광정은 하서 수장이다. 천보말년 이주자사가 되었다. 안록산의 난으로 서북변경의 수비병이 반란 진압에 투입되면서 하서, 농우의 군읍이 모두 토번에 함락되었다. 오직 광정 만이 수년간 이주를 지켰다. 외부로부터 구원이 당도하지 않자 오랑캐는 여러 가지를 내밀며 꾀어냈지만 그는 끝내 굽히지 않았고 부하들도 뜻을 같이 ..
모난 돌이 정 맞듯이 사람들에게 스케치북처럼 보이는 돌도 있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는 누가 봐도 스케치북이나 광고판처럼 보인다. 저 멀리 서역에도 그런 바위가 있었나 보다. 사람들이 오래 산 터전은 다 이유가 있듯, 새기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환채구비가 있는 길은 사막 오아시스와 초원지대를 연결하는 통로로, 사막 오아시스는 여기를 통해 목재를 수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640년 고창국 원정 직전 당의 장수 강행본(姜行本)도 이 길로 나무를 가져와 투석기를 만들었다. 이하 설명은 마옹(馬雍)의 글을 옮긴다. 사진은 바이두에서 다운 받은 것인데, 글자는 못읽더라도 한번 가보고 싶다. 동한 영화5년(140) 환채구비(煥彩溝碑), 옛 사남후비(沙南侯碑) 환채구(또는 환차이거우)는 하미(哈密)에서 바리쿤(巴里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