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역사 (3)
일상 역사
"고종이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모 국회의원 후보자가 고종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 구설에 올랐다. 후보자는 “고종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밤마다 파티를 했어. 그래서 나라를 망친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역사’라는 타이틀을 붙여 이야기할 때는 근거 없이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그럼 고종의 일상은 어땠을까? 경술국치 이후 고종이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신문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한자가 많고 옛 문투라 대충 고쳐보면 아래와 같다. 이태왕 전하의 근황(近狀) 이태왕 전하의 근황을 알아본(漏聞) 즉 매일 오전 10시경에 기침하시어 즉시 조찬을 받으시고 오후 2시경에 서양 요리를 받으시며 오후 7시 혹은 8시에 조선 요리를 받으시는 것이 상례라 하며 또 취침하시는 시각은 대개 오후 10..
일제의 잔재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그 시대가 진정 치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흔적을 지우고 없애려고 힘쓰는 이들이야말로 증거를 인멸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자들이다. 몇 년 전 충청남도 부여의 사자루 현판 사건은 그 대표적 일례다. 부여는 백제의 고도로 부소산성은 수도가 위기에 처할 때 농성 하고자 만든 산성이다. 오늘날 부소산성 정상에는 사자루라고 하는 누정이 있다.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의 다른 이름이 사자산泗泚山이오, 부소산성의 다른 이름이 사자성泗泚城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나 부여의 옛 이름이 사비泗沘인 데다 한자도 비슷하게 생겨 ‘사비루’로 잘못 읽히기도 했다. 앞면 3칸, 옆면 2..
고조와 고종의 자만 쓰다. 高祖高宗獨書字 구당서舊唐書 본기는 황제의 자字를 모두 기록하지 않았고, 신당서新唐書는 고조高祖와 고종高宗 두 황제의 자만 기록했다. 단, 스무 명의 황제 가운데 이 두 명의 황제만이 자가 있었을까, 돌아보면 그런 건 아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사마씨(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씨(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한의 본기에서 고제高帝의 자를 쓰고 휘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휘와 자 모두 쓰지 않았다. 사마씨와 반씨는 한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휘와 자를 썼다. 구당서에서 자를 쓰지 않은 것은 고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당서에서 두 황제의 자만 쓴 것은 그 기준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舊紀各帝皆無字, 而新書於高祖・高宗二帝獨書其字, 但二十帝之中只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