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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세종시특별자치시(시장: 최민호)는 부강면을 독립운동사적지로 추진하며 홍순형洪淳馨에 주목했다. 이에 앞서 시는 부강면의 고택을 기존의 '유계화 가옥'에서 ‘홍참판 댁’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지난 6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황당한 행사를 거창하게 진행했다. 이 행사 자료집 원고에 따르면, 또 한 명의 제국익문사 요원, 여문 홍순형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세종 인물이 있는데, 바로 여문 홍순형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으로 헌종비 효정왕후의 조카이다. 1874년 증광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중략)… 제국익문사의 사기(차관급)이 되어 이호석 독리를 보필하는 한편, 세종 부강면 김재식 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서를 짓게 된다. ..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최근 세종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학술행사회를 개최했다. 이 학술행사의 주요 요지 가운데 하나는 세종시에 거주했던 김재식의 독립운동 활동을 규명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해 세종시가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 근거지, 세종"을 주제로 사적지를 조성해 보겠다는 목적도 겸하고 있다. 이 행사에서는 세종특별자치시 최민호 시장이 개회사를 하고, 더불어 국가보훈부 이희완 차관,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축사를 했다. 이번 행사는 당연히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되었고, 향후 사적지 조성 사업까지 함께 한다면 더 많은 세금이 투입될 터다. 일제의 강점에서 일신을 다 바쳐 노력한 독립운동에는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런 만큼 독립운동 서훈 지정 여부는 엄격해야 한다. 독립운동..
#역사왜곡 #세종시 시리즈요즘 지방자치단체를 보면, 동네 역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난 정부의 가야사 지원 방침엔 경주를 제외한 삼남이 모두 가야라고 외쳤고, 또 어떤 곳에서는 불과 몇 년 유지되었던 후백제를 기념하겠다며 고답적인 학술행사를 연달아 개최했다. 하지만 그런 행사, 기껏 예산 투입해서 해봐야 오히려 근본 없는 동네 밑천 드러내는 꼴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사적지 조성해봐야 그 누구 찾아오지 않는 장소가 될 것이다. 어느 지역 어디나 사람의 숨결이 있었던 곳이고, 또 이야기도 풍성할 텐데, 이야기를 찾아낼 능력이 없으니 국가체(정치집단의 중심지)나 독립운동과 같은 기존 흐름에 얹어내려 하다 이 꼴을 못 면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세종시다. "독립운동 이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따라서 검..
얼마 전 의친왕의 한 후손이 의친왕의 독립활동을 열거하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의친왕이 도산 안창호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해 스티븐슨 암살 사건을 지시" 그리고 대한제국 고종의 후손 단체 홈페이지에는 의친왕이 1902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써달라”며 금일봉을 전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가 인터넷을 타고 여과 없이 전파되면서 진짜 사실인냥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서 이를 검증해 보고자 한다. 공립협회를 의친왕이 설립했다고?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다. 하와이에 정착했던 교민 다수가 이 무렵 미국 본토로 생활 터전을 옮기고 있었다. 이에 1904년 로스..
상해망명 기도 사건 한 건으로 의화군義和君,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 이강은 일약 황실의 독립운동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실제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은사금(83만원)을 받았다. 또한 증빙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 상해망명 기도 역시 첩을 데리고 가겠다는 둥, 돈은 준비되었냐는 둥 하며 시간을 끌어 결국 붙잡히는데 기여했다. (잡히고 나서 꼬리자르기 했던 일은 아버지 고종과 꼭 닮았다.)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 특성 상 증거가 남지 않아"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직간접적 친일행적이나 주색에 매몰된 방탕한 생활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불리한 자료는 조작이나 못믿을 이야기라며 눈을 돌리고 증거를 제시하면 식민사관 운운하며 프레임에 ..
동아일보 1921년 3월 8일자에 실린 기사다. 이강 공 전 애첩을 협박하고 오십원을 강탈 시내 권농동 88번지 사는 양대현梁大鉉(38세)는 정영원鄭永源(41세)이란 사람과 공모하고 항상 상해上海 가정부(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금전을 모집하고자 시내 당주동 이강李堈 공의 전 애첩愛妾 이연연이를 협박하되 금전을 제공해야지 만일 내지 아니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하였으므로 연연이는 어찌 몹시 놀랐던지 오십원을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각처에서 금전을 강탈한 죄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각 1년 6개월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대로 복죄하였다더라. 황실 유일 독립운동가 의친왕에게는 여러 여성이 있었다.(개벽 기사를 보면 그가 이 방면에 얼마나 유명했던 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름을 남긴 이들은 정실이거나 자녀가 있..
"우리나라를 병탄 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 나도 한국의 일민一民이라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일 서민이 될지언정,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 제공諸公과 악수 동심하여 사생 간에 광복에 힘을 다하여 여러 동포가 고심하는 만의 일이라도 보조하려 하는 것이니 나의 이 결심은 하나는 자가自家의 복수를 위한 것이며 하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라.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1919.11.20.)에 실린 글이다. 늘 "독립운동가 의친왕" 대목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글이다. 의친왕은 임시정부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뜻을 알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래는 체포되고 며칠 뒤 이강 공이 조선총독 사이토(齋藤) 제독에게 전달한 서신이다. 여기서 이강은 이렇게 ..
개벽은 천도교에서 낸 잡지로 1920년 6월에 창간했다. 천도교의 대종사장 정광조는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교주 손병희와 의논하여 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고, 개벽은 그 결실이었다. 손병희와 의친왕은 친분도 깊었다니, 개벽에 소개된 기사는 의친왕을 잘 알고 쓴 글이리라. 아래는 1924년 7월 1일 발간된 제49호의 기사다. 개벽의 기사 제목은 색색형형의 경성 첩마굴 가경가증할 유산급의 행태 色色形形의 京城 妾魔窟 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번역하면 각양각색 경성의 첩 소굴, 놀랍고 가증스러운 유산계급의 행태글쓴이는 관상자觀相者우리 조선 사람치고는 웬만한 사람은 대개 다 첩이 있다.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이도 있다. 학교의..
위키백과 의친왕 항목에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 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고 했다. 또 나무위키는 “고종의 5남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유공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 경찰의 조사 내용은 이를 의심케 한다. 후손을 비롯한 이강의 지지자들은 이 조사 기록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큰 파장이 있어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상해로 가려 했던 사실은 당시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실린 정도로 감춰진 일도 아니었다. 또한 심문조서를 굳이 조작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망명을 주도했던 김가진金嘉鎭 은 의친왕이 “부족하지만” 순종은 창덕..
사동궁寺洞宮은,대한제국의 의친왕부義親王府, 일제강점기 이강李堈 공저(후에 이건李鍵 공저)다. 오늘날 관훈동, 인사동 일대 대지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부속 건물 하나만 남아 인사동 관광홍보관이 되었다. 그러면, 왜 이리 되었을까? 어디선가 게재한 글을 읽다보니 대한민국 정부가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 1945년 사동궁을 강탈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위 설명은 기본 팩트부터 틀렸다. 1945년은 정부수립 이전으로 이승만은 광복 후 막 귀국한 유력 인사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황실재산처리법은 1954년 9월에서야 제정되었다. 사동궁 지분이 쪼개진 건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광복 후 사동궁이 어떻게 해체되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