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52

의화궁, 국유지를 일본인에게 임대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반병률 교수는 논문 "상해 임시정부와 의친왕: 구황실 조항과 의친왕의 ‘탈국’ 사건을 중심으로" 국문 초록에서 “의친왕 이강 공은 항일의식이 강하여 항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황실 인사로 한국인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던 인물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정작 의친왕의 행적을 보면 그랬을까 싶다. 반일의식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치일 이전까지 그에게서 어떤 반일행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의친왕은 개인사 문제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매달렸으며, 일본 유학 중에 쓴 사채를 갚는 와중에는 고종을 속여 더 많은 돈을 받아냈다. 일본 기록은 일본에 호감이 있다고도 했다. 어쨌든 오늘 자료 역시 흥미로운 자료다. 이하 의화궁은 의친왕을 말한다. 황성신문 1908년 11월 25일..

이왕가 사람들 2025.07.10

의친왕 망명 시 진관사를 들렸다는 거짓말

의친왕을 숭모하는 사람들은 1919년 의친왕이 상해 망명 시 진관사를 들렸다고 말한다. 아래는 모 단체 홈페이지의 내용이다. "의친왕은 왕실 원찰 진관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동단의 국내 비밀 지부로 활용하였다. 의친왕은 상해로 망명 당시에도 진관사와 안전 가옥을 들렀다가 근처 수색역에서 만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제목에서 말했듯 이 이야기는 거짓이다. 독립지사 백초월 스님과 의친왕을 엮어보고자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 사건이 불발된 후 붙잡혀 온 의친왕(당시 신분은 이강공이었으나 편의상 의친왕으로 함)은 신문조서에서 “북문 밖 최성호의 집”에 있다가 “수색역에 도착, 열차를 탔다”고 했다. 최성호의 집이 있던 북문 밖은 “고양군高陽郡 은평면恩平面 구기리舊基里”로 세검정 근처였다. 또한 의친왕에..

이왕가 사람들 2025.07.06

방명록에 답합니다.

수인당 후손을 자처하는 분께서 이 블로그 망명록에 나를 식민사관에 물든, 식민지청산에 실패한 결과라며 글을 남겼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제글에서 왜곡이 무엇인가요?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차 언급했듯 납득할 수 있음 글 내리겠습니다. 사과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퉁쳐서 식민지의 적폐란 식으로 비난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근거를 제시해주세요. 선동이요? 출처 없는 구전, 팩트 조작에 근거한 주장이야 말로 선동입니다. 예를 들면 1909년 거창에서 의친왕 이강이 정태균과 의병 기의를 모의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의친왕은 그 때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거든요. 또 독립지사 이강 선생의 사적을 도용해 공립협회 주필 운운 의친왕 이강의 사적인냥 포장한 건 의도된 역사 왜곡이고요. 또 독립지사..

이왕가 사람들 2025.07.05

사이토 마코토 문서에 남은 전직 의친왕 이강 공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두 조슈번 육군출신 총독이 주도했던 무단통치는 3.1.운동이란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이에 일본은 육군 대신 해군 출신을 선택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다. 사이토는 부임하던 날부터 간담을 쓸어내렸다. 사이토가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강우규 의사는 그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이토는 1919년부터 1927년까지, 그리고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문화정치’를 표방, 유화책을 썼다.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한국어 신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탄생한 것도 이때다. 1932년 총리가 되었으나 내각의 비리로 1934년 사임한다. 그리고 1936년 2.28. 사건 시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 의..

이왕가 사람들 2025.07.03

의친왕의 벗, 동계고택의 정태균 - 가짜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동계 고택 또는 정온 고택의 "모와某窩"라는 현판은 의친왕이 정태균에게 써준 것이다. 그래서 정태균 집안, 그리고 이강 집안은 이것이 두 사람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자랑한다. 의친왕기념사업회는 1909년 이강이 거창에 내려가 정태균과 사선대에서 의병을 양성했다고 주장한다. 정부기관 국가유산청의 모 연구사는 몇 년 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리고 국가유산청은 홈페이지로 이 내용을 그대로 서비스 중이다. "정온 고택 그리고 정태균과 연관된 인물이 있으니, 바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1877~1955)이다. 정온 고택에는 의친왕의 친필 ‘모와(某窩)’라는 현판과 고택에서 15㎞ 떨어진 ‘사선대(思璿臺)’ 등 그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1909년 의친왕이 항일 의병활동 모의를 ..

이왕가 사람들 2025.06.21

이토 히로부미에게 신세 한탄한 의친왕 이강

러일전쟁의 승리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제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경제 정책을 주관한다. 그리고 초대 통감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 부임한다. 통감은 대한제국 각부 대신을 소집해 시정 관련 회의를 개최했는데, 현재 회의록이 전한다. 1906년 7월 12일 오전 10시 반에 제8회 회의가 열렸다. 이날 참석자는 이등박문 외 찬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탁지부대신 민영기,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통역은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고쿠부 쇼타로) 등이었다. 이날 열린 회의 안건 가운데 하나가 의친왕 전하였다. 왜? 의병 지원이나 반일 사상 때문이었을까? 그럼 회의록을 보자. 이토 통감: 의친왕義親王이..

이왕가 사람들 2025.05.17

우국지사 매천 황현, 의친왕 이강을 기록하다

우국지사 황현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나라가 500년 간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 죽지 않는 선비가 없는 것은 슬픈 일"이라며 독약을 마셨다. 광복 후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그는 1864년부터 1910년까지 편년체 역사서 매천야록을 남겼다. 매천야록은 지방 사림에 눈에 비친 조선, 대한제국 멸망사다. 물론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로 정보의 제한, 또는 사인의 감정이 섞였음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고종, 명성황후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최근 의친왕을 숭모하는 단체가 나타나 여러 독립지사 후손을 찾아다니며 의친왕의 업적을 허위 분식하고 있다. 그들의 나쁜 점 중 하나는 의친왕의 몹쓸 행동이나 일제에 협력했던 모습을 담은 기록은 ..

이왕가 사람들 2025.05.17

의친왕 이강, 일본 경찰에 실토하다-의친왕 상해 망명 사건의 진실

신보晨報는 신종보晨鐘報라는 이름으로 1916년 8월 15일 발간을 시작했다. 량치자오梁啓超, 린장민林長民 등이 주도하여 “젊은이가 죽지 않는 한 중국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치 아래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신문이다. 이 신문은 1919년 12월 8일자에서 의친왕 망명 사건의 전말을 다뤘다.신문 기사의 말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이강이 여전히 미심쩍어 하자 한 거한이 총으로 위협하여 결국 그날 밤 11시를 전후하여 이강 공과 마부 김복삼은 북한산으로 끌려갔다. 다음날인 10일 변장하고 수색역에서 기타에 올라탄 이강 공 일행은 11일 오전 11시 30분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기차에서 내린 이강 공은 압록강 다리를 건너 중국 경내로 진입하려다, 뒤쫓아 온 일본경찰에게 덜미가 잡히게 되었다.갑작스런 일본..

이왕가 사람들 2025.05.15

덕혜옹주 장례식, 상주는 누구인가?

덕혜옹주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녀”라고 하지만 실은 일제강점기 이태왕의 서녀로 옹주가 맞는 표현이다. 쓰시마 번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와 혼인했다. 결혼 전부터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은 뒤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신적 강하 이후 영친왕이 생계를 지원하고 또 이혼도 시켰다. 1956년 딸 소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산에서 실종되었다. 박정희 정부 이후 1962년 귀국, 낙선재에 들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1967년 낙선재 내 수강재에 기거하다 1989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관련 소설, 드라마가 있으나 허구가 심해 대체역사로 봄이 타당하다. 위키피디아 덕혜옹주 항목 중 “영결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4월..

이왕가 사람들 2025.05.10

나무위키 "의친왕"의 신뢰성

나무위키를 보니 의친왕 숭모자들이 열일한다 생각했고 또 역사학도로서 이런 거짓역사를 술술 풀어내는데 방관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나무위키 "의친왕" 항목의 언설은 다소 교묘한 부분이 있다. 최근 이 블로그에서 의친왕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언급하니, 그걸 그대로 쓰되, 슬그머니 양쪽을 모두 검토해야 한다는 식의, 또는 일제의 기록이니 신뢰할 수 없다로 일단락지음으로 써 객관성을 확보한 척하더라. 그러나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마치 몇 년 전 누군가가 떠들어대듯 대륙 조선설도 일종의 학설이니 공공역사에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했던 말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신문조서를 보면 이강공(전 의친왕)은 끌려간 것일 뿐이며, 독립선언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지들끼리 제멋대로 꾸민 일이라고 했다..

이왕가 사람들 2025.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