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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역사
얼마 전 우연히 어떤 글을 보았다. 그 글은 고종과 그 일족에 대한 비난을 "식민사관"으로 치부하며, 손톱만한 독립운동, 또는 뇌피셜 속 저항의식을 미화, 분칠하고 있었다. 후손이 조상의 어두움을 가리고 또 작은 기여를 현창으로 포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함부로 그들의 과오를, 또 역사적 사실을 "식민사관"으로 덮어버리려는 모습을 보며, 진정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참모습을 모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몇 년 전 왕실 후손 한 명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황제 즉위식을 열었다. 황제에 옹립된 이는 고종의 손녀이자 이강 공(의친왕)의 딸 이해원이었다. 1919년 태어나 일제강점기 내내 운현궁에서 호의호식하고 또 경기여고, 게이오대학(경응의숙) 법문학부까지 졸업했으나 광복 이후 스스로 생계를 ..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려 했다 실패했다. 그래서 다른 대한제국 황실 가족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뇌피셜로 증거도 없는 독립운동 이야기를 덧붙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또 증좌도 없는 그런 이야기를 퍼 나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망명 사건 이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은 이강뿐이다. 망명 실패 이후 그를 망명시키려 했던 인사들의 구명운동은커녕 일제강점기 내내 숨죽이고 살았다. 호기롭게 “내 뜻이오”라는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최소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고종의 뜻”이었다며 고종을 찬양하지만 자신이 보낸 밀사들의 삶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고종의 모습은 잘 모른다. 고종과 그의 가족들은 나라를 소유물..
일제의 잔재를 지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그 시대가 진정 치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흔적을 지우고 없애려고 힘쓰는 이들이야말로 증거를 인멸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자들이다. 몇 년 전 충청남도 부여의 사자루 현판 사건은 그 대표적 일례다. 부여는 백제의 고도로 부소산성은 수도가 위기에 처할 때 농성 하고자 만든 산성이다. 오늘날 부소산성 정상에는 사자루라고 하는 누정이 있다.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의 다른 이름이 사자산泗泚山이오, 부소산성의 다른 이름이 사자성泗泚城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나 부여의 옛 이름이 사비泗沘인 데다 한자도 비슷하게 생겨 ‘사비루’로 잘못 읽히기도 했다. 앞면 3칸, 옆면 2..
의친왕 이강의 적장자는 모모야마 겐이치(1909~1990)다. 옛 이름은 이건李鍵으로, 누가 시켜 개명한 게 아니라 스스로 한 것이다. “이은 가족은 모두 조선명, 이건공은 성마저 왜놈식으로” 패망한 군국주의 일본과 같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황족들이 이제는 일반인민들과 같이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거니와 이 황족들과 같이 왕족에서 물러난 이조 왕족의 자손들의 동향 한토막. 이태왕의 삼자인 이은(52세) 해방 후 시부야에서 과자 가게를 경영하며 조선이 그리워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말까지 하였다는데 지난번에는 조선식으로 자기 처 이본궁방자(48) 아들 구와 같이 개명까지 하였다 한다. 즉 이은李垠은 은흥垠興 처는 유희兪嬉 아들은 구학玖學으로 개명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은의 사촌인 이건공은 성명까..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할 때 제일의 부자는 왕실이었다. 왕실은 역둔토며 전국의 산림수택을 소유했다. 군함 하나 사는 데도 낑낑거렸던 대한국이었지만 이권이 있는 곳에는 황실이 있었다.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족 또는 왕족 가운데 어장 소유자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조선의 의화군, 대한제국의 의친왕, 일제강점기의 이강공, 즉 이강李堈이다.고종, 바다가 자기 것이라며 왕자에게 주다통영군 연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민 3,268명은 연명하여 이영재, 옥치기, 이주목, 김종혁, 황치종 등을 대표자로 해서 이강공 전하 소유의 어장(漁區)개방 청원을 총독부와 이강공저(李堈公邸)에 제출하였는데, 그 일에 대해 혹 이강공저 사무관 구로자키(黒崎) 이강공저李堈公邸 사무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강공 저하 소유..